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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약탈하라"... 십자군전쟁의 충격적 실체 드러나

 중세 유럽은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였다. 게르만 왕국의 영토전쟁, 동로마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충돌, 13세기 몽골의 유럽 침략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전쟁과 14-15세기의 백년전쟁이다. 두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실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십자군전쟁의 발단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튀르크가 동로마제국을 격파한 사건이었다.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유럽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신께서 원하신다"라는 구호와 함께 이슬람 제국과의 성전을 선포했다.

 

겉으로는 종교전쟁이었지만, 십자군전쟁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교황은 세속군주들의 권위를 누르기 위한 위업이 필요했고, 영주와 기사들은 영토와 부에 대한 욕망을, 상인들은 이윤 추구의 기회를 찾았다. 종교는 단지 명분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십자군전쟁은 8차례에 걸쳐 200년간 지속됐다. 제1차 원정(1095-1099)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제2차 원정(1147-1148)은 실패했다.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이 등장하면서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제3차 원정(1189-1192)에서는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4차 십자군전쟁(1202-1204)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약탈했다. 이는 종교적 대의명분이 완전히 변질되어 돈을 위한 전쟁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십자군전쟁 과정에서 템플기사단은 특별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점차 대부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그들은 십자군에 참전하는 기사들에게 30-40%의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었고, 이는 약탈과 파괴의 악순환을 낳았다. 결국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1307년 템플기사단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그 자신이 기사단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십자군전쟁은 실패했지만, 유럽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교역이 활성화되고 화폐경제가 부활했으며, 베네치아와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이 번영했다. 동방과의 교류로 나침반, 화약, 종이, 아라비아 숫자 등이 유럽에 전파되었고, 이는 후일 서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혜택에서 소외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 왕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서유럽 교역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컸다. 영국은 양모를 생산하고 플랑드르는 이를 가공하는 상호의존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초기에는 영국이 우세했으나, 전쟁 과정에서 플랑드르의 모직물업자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영국은 원료 생산부터 제품화까지 모직물의 일괄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되었고, 더 이상 플랑드르 땅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졌다.

 

1453년 백년전쟁이 끝날 무렵,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는 중세의 종말과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백년전쟁을 거치며 유럽에는 국민 의식이 태동했고, 이는 근대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중세의 두 대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와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본질에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전쟁들은 중세 유럽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근대 세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루할 틈 없는 지중해 품은 트레킹 명소

주라 불리는 안탈리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청명한 지중해 절경과 고대 문명의 유적, 그리고 토로스 산맥의 웅장한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트레킹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곳의 트레킹 코스는 고대 도시 유적지, 울창한 숲길, 해안 절벽을 아우르며 걷는 내내 변화무쌍한 풍경과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해 지루할 틈이 없다.가장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튀르키예 최초의 장거리 트레일인 리키아 웨이(Lycian Way)이다. 이 길은 페티예(Fethiye)에서 안탈리아까지 이어지는 약 540km 구간으로, 완주하는 데 평균 35일이 걸린다. 리키아 웨이는 엄격히 정해진 코스가 없어 걷는 이의 페이스와 일정에 맞춰 자유롭게 여정을 계획할 수 있다. 트레일을 따라 펼쳐지는 지중해의 푸른 절벽과 토로스 산맥의 험준한 능선, 고대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잊힌 시골 마을과 숲속 도시들은 걷는 이에게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크산토스(Xanthos)와 레툰(Letoon), 그리고 울창한 숲속에 숨겨진 올림포스(Olympos) 유적지는 고대 리키아 문명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리키아 웨이 주변에서는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어 트레킹에 새로운 재미를 더한다. 패러글라이딩의 명소인 바바다 산(Babadağ), 세계 10대 다이빙 스팟 중 하나로 꼽히는 카쉬(Kaş), 카약 체험이 가능한 케코바섬(Kekova Island), 그리고 암벽 등반의 메카 게이크바르(Geyikbayırı) 등은 자연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모험을 제공한다.두 번째 추천 코스는 세인트 폴 트레일(St. Paul Trail)로, 사도 바울이 초기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길을 따라 약 500km를 걷는 역사적인 여정이다. 이 길은 걷는 이로 하여금 고대와 만나고 그 시절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시간 여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트레일은 고대 도시 페르게(Perge)에서 출발해 쿠르슌루 폭포(Kursunlu Falls)를 거치는 한 갈래와, 아스펜도스(Aspendos), 셀게(Selge), 카슴라르(Kasimlar)를 지나 고대 도시 아다다(Adada)에서 만나는 다른 갈래로 나뉜다. 이후에는 에이르디르 호수(Eğirdir Lake)와 ‘슬로우 시티’로 지정된 얄바츠(Yalvaç)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세인트 폴 트레일은 종교적 역사와 자연 풍광이 어우러져 독특한 감동을 전하는 동시에 걷는 이에게 영적인 의미까지 부여하는 길이다.마지막으로 소개되는 피시디아 헤리티지 트레일(Pisidia Heritage Trail)은 안탈리아 북부 토로스 산맥을 따라 350km에 달하는 코스다. 이 길은 고대와 자연, 현대의 삶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으로, 2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사갈라소스(Sagalassos)의 안토닌 분수(Antonine Fountain)와 고대 도시 테르메소스(Termessos)의 돌계단과 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요뤽(Yörük) 유목민들의 고원 마을들도 이 코스의 일부를 형성하며,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삶의 모습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피시디아 헤리티지 트레일은 세인트 폴 트레일과 일부 구간이 겹쳐, 고대 문명의 유산과 자연미, 그리고 현대인의 삶이 어우러진 다층적인 여행 경험을 제공한다.튀르키예문화관광부는 이 세 코스를 통해 안탈리아가 단순한 휴양지 이상의 가치를 지닌 ‘걷는 여행’ 명소임을 강조하며, 트레킹 애호가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여행자에게 새로운 여행의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한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고대 도시의 신비, 그리고 산악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안탈리아의 트레킹 코스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추천 코스들은 현대인들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자연과 역사를 만나는 ‘걷는 여행’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