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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카세, 협찬인 줄 알았던 한복이 50벌…"전부 내 돈 주고 직접 수선해 입어"

 '이모카세'로 잘 알려진 요리계의 아이콘 김미령 셰프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그녀의 치열했던 삶의 단면을 공개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한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김 셰프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단 한 벌의 협찬도 받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녀의 한복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의상이 아닌, 실제 주방에서 일하기 위한 맞춤형 작업복 그 자체다. 시장에 직접 나가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고르고, 요리하는 데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팔 통을 줄이고 치마 길이를 조절하는 등 모든 것을 직접 수선해서 입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모인 한복이 계절별로 무려 40~50벌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스타일에 얼마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요리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녀의 삶은 한복 이야기보다 더욱 극적이었다. '국수를 삶다가 아이를 낳았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며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이다. 아들의 출산 예정일이 하루 남은 날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주방에서 손님을 위한 국수를 삶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에 몰두한 나머지 산통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녀의 만삭의 배를 보며 불안해한 손님들이 제발 병원에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을 정도. 심지어는 불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불러온 배 때문에 앞치마에 불이 붙어 아이 한 명을 낳을 때마다 서너 개의 앞치마를 태워야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일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국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단 두 번 힘을 주고 아이를 낳았다는 일화는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김미령 셰프의 초인적인 열정은 출산 후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곧바로 한식, 일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에 나섰다는 사실은 경이로움마저 자아낸다. 아이에게 3개월간 모유 수유를 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단 하루의 휴식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 갓난아이와 시어머니를 동반해 시험장으로 향했고, 잠시 짬을 내 아이에게 젖을 물린 뒤 시험장 아래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다음 시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오직 그 시간밖에 없었다는 그녀의 담담한 회상은, 꿈을 향한 집념과 엄마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여성의 위대한 분투를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이처럼 김미령 셰프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단순히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넘어, 그녀의 요리가 왜 특별한지를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서사다. 손님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밥 한 끼, 정성 가득한 국수 한 그릇에는 이처럼 불꽃같이 뜨거운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인생과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모카세'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그녀의 음식들이 단순한 맛을 넘어 깊은 감동과 위로를 주는 이유는, 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열정과 끈기로 자신의 길을 걸어온 '엄마' 김미령의 인생 자체가 가장 강력한 레시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성군, 부끄러운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다…'경호정'의 재발견

어있기 때문이다. 1934년, 당시 조선총독부 음성군수였던 권종원은 일본 왕세자 아키히토의 탄생을 축하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 정자를 세웠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정자가 위치한 인공 연못과 섬의 구조가 일장기를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네모난 연못 안에 둥근 섬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일제의 상징을 숨겨 놓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존 안내판에는 경호정이 친일 목적의 조형물이라는 설명이 빠져 있어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안내판 교체는 뒤늦게나마 역사를 바로잡고, 부끄러운 과거를 후대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음성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경호정 건립 과정에서 드러난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500평에 달하는 연못을 파고 그 안에 200평 규모의 섬을 만드는 대규모 공사에는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건축물 건립을 넘어, 당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증명하는 대목이다. 더욱이 경호정 옆에는 ‘독립기념비’라는 이름의 비석이 서 있는데, 이 또한 본래는 아키히토의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철거되지 못한 채 글씨만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 비석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물이다. 이처럼 설성공원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지역 사회에서는 경호정과 기념비의 처리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논쟁이 이어져 왔다. 일제의 잔재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픈 역사도 역사이므로 보존하여 후대에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오랜 논의 끝에 음성군은 전문가 자문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존치’를 결정했다.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 건립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알리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수정된 안내판에 ‘경호정은 친일 인물로 분류되는 권종원이 음성군수로 재임할 때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세운 일제 잔재물이다’라는 문구를 명시한 것은 이러한 결정의 결과물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를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인 셈이다.이번 음성군의 결정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 잔재 청산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무조건적인 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 역사적 맥락을 정확히 기록하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청산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음성군은 앞으로도 지역 내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물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그 성격에 따라 철거 또는 보존의 원칙을 적용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번 경호정 안내판 교체를 시작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더 많은 친일의 흔적들이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오르게 되기를 기대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