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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바닥인데 어쩌나"…이재명 정부, '일단 돈부터 풀고 보자'

 이재명 대통령이 현재의 심각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잠재성장률을 반등시키기 위해, 내년에 이어 2027년까지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 이 대통령은 11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현재 경제가 "너무 바닥이었고, 하향곡선" 상태라고 진단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경제가 스스로 회복할 동력을 잃었다는 판단 아래,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 투입을 통해 경기 하강의 흐름을 '우상향'으로 억지로라도 끌어올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업무보고에서 이 대통령은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내년에도 올해 규모로 확장 재정 지출을 해야 하나, 아니면 완화해도 괜찮냐"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이에 구 부총리는 세입 여건이 개선된다면 국채 발행을 줄이면서도 인공지능(AI) 투자나 초혁신 경제성장 같은 미래 먹거리 분야에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은 "내후년도 확장 재정 지출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라고 재차 확인하며, 당분간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무조건적인 재정 확대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는 확장 재정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률이 성공적으로 회복될 경우, 늘어나는 세금 수입으로 재정 지출의 상당 부분을 감당할 수 있어 국채 발행 규모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을 함께 제시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위기 극복을 위해 돈을 풀되, 장기적으로는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는 선순환 구조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결국 단기적 충격 요법으로 경제의 불씨를 살려낸 뒤, 그 과실로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한편, 이 대통령은 이날 경제 분야의 처벌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하게 역설했다. 경제형벌합리화 TF 관련 보고를 받은 뒤, "우리나라는 형벌법규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며 말문을 열었다. 특히 경제 분야의 형사처벌은 "국가의 역량은 소진하는데 제재 효과가 사실은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실효성 없는 형벌 대신, 기업에게 "합당한 경제적 부담을 지어줘야 어떤 것이 손실이고 이익인가를 파악하게 된다"며 실질적인 '경제 제재' 중심으로 처벌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