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타임

스포츠타임

KIA의 최종 제안은 '모욕'이었다…최형우가 삼성 복귀를 택한 이유

 결국 KIA 타이거즈의 마지막 제안도 ‘1+1년’이었다. KBO리그를 대표하는 베테랑 타자 최형우(42)가 9년간 몸담았던 호랑이 군단을 떠나 자신의 프로 데뷔팀인 삼성 라이온즈로 전격 복귀한다. 2025시즌에도 불혹을 잊은 맹타를 휘두르며 팀의 핵심으로 활약했기에 그의 잔류는 당연해 보였지만, 계약 기간에 대한 양 구단의 미묘한 시각차가 결국 레전드의 이적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돈의 액수보다 ‘보장된 미래’에 대한 가치를 택한 최형우의 결정은, 베테랑을 대하는 구단의 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기만성’의 상징과도 같은 최형우는 2002년 삼성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2016년까지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삼성 왕조’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33세의 나이에 첫 FA 자격을 얻어 KIA와 4년 총액 100억 원이라는 KBO리그 역사상 최초의 100억 계약을 터뜨리며 광주에 둥지를 틀었다. KIA에서도 그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고, 2020년 두 번째 FA에서 3년 47억 원에 잔류했으며, 2024시즌을 앞두고는 1+1년 22억 원의 비FA 다년계약까지 체결하며 호랑이 유니폼만 9년을 입었다. 그리고 2025시즌, 133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7, 24홈런, 86타점이라는 20대 선수 못지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이처럼 압도적인 성적표를 남겼기에 최형우의 KIA 잔류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였다. 하지만 시장이 열리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9년 전 그를 떠나보냈던 친정팀 삼성이 ‘윈나우(Win-now)’ 기조를 내걸고 그의 영입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삼성은 내년이면 43세가 되는 최형우에게 ‘2년 보장 계약’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단순히 1년을 더 보장하는 것을 넘어,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팀의 승리를 이끌 즉시 전력감으로 최고 수준의 평가를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반면, KIA는 협상 초반부터 유지해 온 ‘1+1년’이라는 계약 기간의 틀을 끝까지 고수했다. 지난 28일 내민 최종 제안에서도 계약 기간은 변하지 않았다. 야구계에 따르면 KIA와 삼성이 제시한 최종 오퍼의 총액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승부는 결국 보장된 기간과 그에 따른 보장액에서 갈렸다. 한 야구계 관계자는 “최형우가 돈 때문에 이적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KIA의 첫 제안과 마지막 제안의 총액은 올랐을지 몰라도, 계약 기간은 1+1년 그대로였다”고 귀띔했다. 이는 결국 2년이라는 시간을 확고하게 보장하며 가치를 인정해 준 삼성의 진정성에 최형우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