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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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최초로 조명한 韓日 미술 80년의 숨겨진 이야기

 일본 요코하마의 심장부, 1945년 해방 이후 80년에 걸친 한국과 일본의 복잡다단한 미술 교류사를 집대성한 전시가 막을 올렸다. '항상 옆에 있으니까'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대규모 기획전은 단순한 우호 교류의 역사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일본이라는 무대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어떻게 존재하고 투쟁하며 독자적인 별자리를 그려왔는지를 추적한다.

 

전시의 포문을 여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주류에서 비껴나 있던 재일(在日) 작가들의 목소리다. 1950~60년대, 차별과 빈곤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담긴 사실주의 회화들이 대거 소개된다. 특히 불안한 표정으로 배 안에 웅크린 동포들을 묘사한 김희려의 '밀항'은 당시의 절박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잊혔던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현재로 소환한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양국 미술계의 교류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70~80년대 한국 화단을 휩쓴 단색조 회화의 흐름과 일본의 '모노하(物派)'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이우환, 윤형근 등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조명한다. 이는 제도권 안에서 이루어진 공식적인 교류의 궤적을 보여주지만, 전시의 무게중심은 일본 미술계에 진출하려 했던 한국 작가들의 고군분투에 더 가깝게 맞춰져 있다.

 

전시의 한가운데에는 40년 전 위성 기술로 동서양의 만남을 주창했던 백남준의 '바이 바이 키플링'이 상영된다.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시대를 앞서간 미디어 아트를 선보였던 이 작품은, 주변을 둘러싼 재일 작가들의 처절한 현실 고발, 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성찰하는 후세대 작가들의 설치 작업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교류'라는 단어의 다층적인 의미를 되묻게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는 90년대 팝아트의 교감과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재일 3세대 작가들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선배 세대와는 다른 감수성으로 분단과 정체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이들의 영상과 설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일본 대학과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담벼락을 허물었던 2016년의 설치 프로젝트 기록은 '가깝고도 먼' 두 나라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요코하마 전시는 일본의 시선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돌아본 최초의 대규모 전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부 핵심 작가들의 부재와 같은 아쉬움도 남긴다. 오는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로드무비'라는 제목으로 열릴 한국 전시는 이러한 빈틈을 메우고 더욱 완전한 형태의 80년 교류사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판소리와 포크의 만남…구례 가을밤 울린 ‘시인의 마을’

추임새와 박수가 이어졌다. 전통 판소리의 깊은 울림에 이어 익숙한 포크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노래와 함께 호흡하며 구례의 가을밤을 즐겼다.지난 17일 밤 열린 구례 동편제소리축제에서는 지역 명창들의 판소리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소리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무대를 선사했다.이날 구례 명창들의 공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박정선 명창의 ‘적벽가’였다. 박 명창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힘 있는 소리로 풀어냈다.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관객들은 추임새와 박수로 소리꾼의 무대에 호응했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긴장감이 무대를 채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 속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소리꾼의 목소리와 몸짓에 관객의 반응이 더해지며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함께 만들어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공연의 분위기는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무대에 오르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오랜 시간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해 온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마을’의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노래의 첫 소절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반응에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노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겼다. 앞선 판소리 무대에서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며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집중했다. 한 곡의 노래가 오랜 세월 쌓인 기억을 불러내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정태춘·박은옥은 ‘북한강에서’ 등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며 공연의 여운을 이어갔다.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국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이를 전하는 목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판소리와 포크음악은 표현 방식과 음악적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소리와 이야기로 전해왔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며 청중과 소통해 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이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다.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으로, 동편제 판소리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역 명창들의 전통 소리를 감상한 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만나는 구성은 이번 축제의 특별한 장면으로 남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첨단 조명과 대형 LED 화면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오래된 판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경계보다 서로 다른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감동을 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무대였다.전통문화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장르와 어우러질 때, 전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판소리의 추임새와 대중가요를 향한 박수가 같은 밤에 이어진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구례 동편제소리축제의 가을밤은 그렇게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함께 만드는 공연장으로 변했다. 명창의 소리에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를 외쳤고, ‘시인의 마을’이 시작되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출발한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고, 관객들은 그 울림을 함께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