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생활문화

물방울 화가 김창열을 키운 전설의 화실

 해방 직후, 좌우 이념 대립으로 한국 전체가 들끓던 혼란의 시기. 정치적 구호가 예술계를 뒤덮던 그때,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모인 예술가들의 성지가 있었다. 서울 돈암동에 자리했던 '성북회화연구소', 바로 그 전설적인 공간과 그곳을 이끌었던 천재 화가 이쾌대의 이야기가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펼쳐졌다.

 

현재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1946, 성북회화연구소'는 바로 이 잊혀진 역사의 조각들을 복원하는 자리다. 이 전시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성북구의 지역적 자산을 바탕으로, 구립미술관이 오랜 기간 축적해 온 깊이 있는 연구의 결과물이다. 비평가들 사이에서 올 상반기 반드시 봐야 할 전시로 꼽히는 이유다.

 


전시의 시작은 최근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며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쾌대의 걸작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연다. 두루마기와 팔레트, 붓과 중절모가 한 화면에 담긴 이 작품은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던 시대의 고뇌와 자의식을 담은 한국 근대미술의 상징과도 같다.

 

원래 이 연구소는 이쾌대가 '군상' 연작 같은 대작을 그리기 위해 마련한 개인 작업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열정을 동경한 젊은 화가와 학도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아카데미이자 사랑방으로 발전했다. 이곳에서 '물방울 화가' 김창열이 끈기를 배웠고, 조각가 권진규가 데생 실력을 닦았다.

 


그러나 이 예술적 낙원의 명맥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비극적으로 끊겼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쾌대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결국 남북 포로 교환 때 북으로 넘어간 뒤 수십 년간 '잊혀진 화가'가 되었다.

 

스승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예술의 씨앗들은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아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이번 전시는 비운의 천재 이쾌대뿐만 아니라, 김창열, 권진규, 남관, 전뢰진 등 그와 함께 예술의 혼을 불태웠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미술사의 가장 뜨거웠던 한 페이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전시는 5월 24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