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Global

중국 모잠비크 운명공동체 선언…대만 외교 고립 심화

 국제 무대에서 대만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을 향한 라이칭더 총통의 외교적 행보가 전례 없는 난관에 부딪혔다. 당초 22일부터 아프리카 유일의 수교국인 스와질란드를 방문하려던 계획이 경유지 국가들의 갑작스러운 항공편 운항 허가 취소로 무산된 것이다. 대만 당국은 세이셸과 모리셔스 등 인도양 국가들이 예고 없이 내린 이번 결정의 배후에 중국의 강력한 경제적 압박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총통의 수교국 방문이 제3국의 비협조로 취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는 중국이 대만의 외교적 숨통을 조이기 위해 물리적 경로까지 차단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결속을 과시하며 대만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같은 날 베이징을 찾은 다니엘 샤푸 모잠비크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나 양국 관계를 '운명공동체'로 격상하는 성명에 서명했다. 특히 공동성명에는 모잠비크가 중국의 통일 실현을 위한 모든 노력을 확고히 지지하며 어떠한 형태의 대만 독립에도 반대한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었다. 이는 최근 북한이 중국의 영토 완정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중국이 우방국들을 동원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국제 사회에 더욱 공고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중국은 경제적 혜택을 앞세워 아프리카 내 대만의 영향력을 지우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아프리카 53개 수교국을 대상으로 한 제로 관세 조치 시행을 예고하며 일대일로 구상과 안보 협력을 포함한 수십 개의 문서를 체결했다. 이러한 대규모 경제 지원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대만 고위층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유인책이 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한술 더 떠 이제 세계에 중화민국 총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라이 총통의 신분을 부정하는 고강도 발언을 쏟아냈다.

 

대만 내부에서는 총통의 순방 무산을 두고 여야가 날 선 공방을 벌이며 국론 분열 양상을 보였다. 집권 민진당 측은 중국의 선의가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야당인 국민당의 친중 행보가 오히려 중국의 위협을 키웠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당은 모든 외교적 실패를 베이징의 탄압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며 당국의 무능을 질타했다. 외교적 위기 상황에서도 정쟁이 이어지면서 대만의 대응 역량이 분산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야당은 정부가 구체적인 증거 없이 남 탓만 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학계와 전문가들은 대만이 직면한 외교적 고립이 향후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 경유가 어려워진 데 이어 스와질란드 방문까지 막힌 현재의 상황은 대만이 기존의 외교 방식에서 탈피해야 함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대만이 미국의 경유 허용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미나 태평양 도서국 등 남은 수교국들과의 진정성 있는 관계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심 없는 미덕을 보여 외교적 기반을 다지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중국의 전방위적인 압박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민진당 집권 이후 10년 동안 대만의 수교국은 절반 수준인 12개국으로 급감했다. 남은 수교국들조차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경유지 확보 없이는 총통의 방문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중국이 제3국에 대한 주권적 결정을 강요하며 항공 안전과 국제 관례까지 무시하는 초강수를 두는 상황에서 대만의 외교적 선택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국제 사회의 규범과 관행을 위반했다는 대만의 규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외교적 포위망은 더욱 촘촘해지고 있으며 라이 총통은 취임 이후 최대의 외교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