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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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심은 '근로' 지우고 103년 만에 되찾은 '노동절'

 대한민국에서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굴레를 벗고 '노동절'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법정공휴일로 처음 시행된다. 2026년 내일 맞이하는 노동절은 단순한 명칭의 수정을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왜곡된 노동의 역사와 작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노동의 가치를 국가가 공식 인정한 첫 번째 사례다. 1886년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의 역사가 140년 만에 한국 사회에서 온전한 법적 지위를 갖춘 기념일로 뿌리를 내리게 된 셈이다. 이번 변화는 노동을 국가를 위한 부역이나 단순한 경제 활동으로 치부하던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권리로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노동절의 역사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어왔다. 1923년 첫 행사가 열린 이후 노동절은 노동자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날이었으나,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이를 공산주의 선전 도구로 규정하며 날짜를 3월 10일로 옮겼다.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는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뀌었고, 원래의 5월 1일은 노동과는 무관한 '법의 날'로 대체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는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적 적대감과 분단 상황을 이용한 이념적 낙인찍기가 결합된 결과였다. 1994년이 되어서야 날짜는 5월 1일로 돌아왔지만, '근로'라는 명칭은 여전히 국가 주도의 수동적 노동관을 대변하며 30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

 


'근로'와 '노동'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를 넘어선 역사적 맥락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국어사전적 의미로 근로는 부지런히 일하는 행위에 방점이 찍혀 있는 반면,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노력 전체를 포괄한다. 특히 '근로'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황국 신민의 의무로서 강제 동원을 정당화했던 '근로보국대'나 '근로정신대' 등에서 사용된 부정적 유산을 품고 있다. 국가가 시키는 일을 기계처럼 수행해야 한다는 일제의 통제 논리가 해방 이후에도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용되어 사용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노동 존중 사회 실현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고 명칭 환원과 공휴일 지정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지난해 법적 명칭이 노동절로 바뀌었고, 올해부터는 모든 국민이 함께 쉬는 법정공휴일로 격상되었다. 이는 노동자가 시혜적 차원에서 하루 쉬는 대상을 넘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주체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제도적 선언이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이번 조치가 노동을 인간의 권리 실현과 연결된 숭고한 가치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며,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기념일로서의 성격을 강조했다.

 


노동절이 공휴일이 됨으로써 얻는 사회적 효과는 단순히 휴식일이 하루 늘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은 그날이 기념하는 가치를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기린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즉, 노동절의 공휴일화는 노동이 소수 노동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교사, 공무원, 프리랜서, 플랫폼 종사자 등 다양한 형태로 일하는 모든 시민의 공통된 가치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해소하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첫 번째 법정공휴일 노동절을 맞이하며 우리 사회는 이제 노동 존중의 가치를 일상의 법과 제도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명칭의 복원과 휴일 지정은 시작일 뿐이며, 이를 계기로 산업 현장의 안전 강화와 차별 없는 노동 환경 조성 등 실질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26년 5월 1일은 대한민국이 노동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과거의 강제 동원적 노동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적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