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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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창고의 변신, 도고 아트홀 방문객 140% 급증

 아산 도고온천의 중심부를 지나 옹기체험관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독특한 외관의 건물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탈의 아픔이 서린 양곡창고로 쓰였던 이 공간은 이제 곡식 대신 예술의 향기를 채우는 문화 저장고로 변모했다. 2014년 코미디라는 특화된 장르로 첫발을 내디뎠던 이곳은 2024년 여름, '도고 아트홀'이라는 새 이름을 얻으며 보다 폭넓은 예술을 수용하는 복합 문화 거점으로 재탄생했다. 낡은 벽돌 사이로 흐르는 과거의 기억은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들에게 묘한 향수와 설렘을 동시에 선사한다.

 

아트홀의 핵심 동력은 169석 규모로 설계된 아담하면서도 알찬 공연장이다. 이곳에서는 매주 주말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화려한 서커스부터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형극, 눈을 뗄 수 없는 마술쇼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라인업이 무대에 오른다. 대도시의 대형 공연장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배우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는 밀착형 공연은 이곳만의 전매특허다. 관객들은 무대 위 예술가들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며 단순한 관람객 이상의 유대감을 경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3,000원이라는 믿기 힘든 관람료 정책이다. 고물가 시대에 커피 한 잔 가격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수준 높은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은 파격적이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는 문화적 소외를 겪기 쉬운 면 단위 지역 주민들에게 문턱을 낮추어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경제적 부담 없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주말 나들이 코스로 이곳을 선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예술의 공공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운영 철학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진심은 수치로도 증명되고 있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 수는 전년 대비 140%라는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하며 지역 문화 지형도를 새롭게 그렸다. 조용하던 온천 마을은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온 외지인들과 지역민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때 폐허처럼 방치될 뻔했던 양곡창고가 이제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지역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는 앵커 시설로 완벽히 자리 잡은 셈이다. 방문객들의 폭발적인 증가는 도고 아트홀이 단순한 공연장을 넘어 지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운영 주체인 아산문화재단은 늘어나는 수요에 발맞춰 서비스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는 6월부터 전격 도입되는 온라인 예매 시스템은 그동안 현장 발권의 불편함을 겪었던 방문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전국 어디서든 클릭 몇 번으로 도고의 공연 좌석을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었다는 지적을 받아온 입장료의 현실화 방안도 조만간 공론화될 예정이다. 이는 안정적인 운영 재원을 확보하고 더 질 높은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도고 아트홀은 이제 새로운 도약의 기로에 서 있다. 양곡창고의 골조를 그대로 살린 전시관과 세련된 카페 공간은 공연 시간 외에도 방문객들이 머물 수 있는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지역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고, 관람객들에게는 문화 향유의 즐거움을 주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킨 이 공간은 오늘도 낡은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도고의 새로운 문화 연대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