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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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아이까지 표적'… 온라인 성착취 잔혹한 실태

 온라인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검은 손길은 언제나 따뜻한 칭찬과 다정한 위로를 가면으로 삼는다. 가해자들은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외모를 치켜세우며 비밀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연다. 하지만 신뢰가 쌓이는 순간, 이들은 돌변하여 성적인 사진을 요구하거나 만남을 강요하는 등 본색을 드러낸다. 최근 1년여간 선고된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 판결문들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온라인 그루밍'은 특정 앱에 국한되지 않고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디지털 공간에서 전방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의 주된 표적은 정서적 독립과 성적 호기심이 공존하는 시기인 중학생들에게 집중됐다. 분석 대상 피해자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 중학교 1~3학년에 해당했으며, 평균 연령은 14.1세에 불과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초등학생 이하 어린 아동들의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7세에 불과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메타버스 게임 공간에서 성적 메시지를 받는 등 범죄의 연령대는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접한 아이들이 온라인상의 타인에게 거부감 없이 친밀감을 느끼는 특성을 가해자들이 악랄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들이 아이들에게 처음 접근하는 통로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대중적인 플랫폼들이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과 X(옛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접근성이 높은 SNS가 범죄의 주요 인프라로 활용되고 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랜덤 채팅앱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소통 공간이 성착취의 사냥터로 변질된 셈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시작된 그루밍은 평균 100일 넘게 지속되며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종속시킨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온라인상에서 연인 관계인 것처럼 행세하며 가족이나 지인으로부터 아이를 고립시키는 수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범죄의 양상은 온라인상의 대화에 머물지 않고 오프라인에서의 강력 범죄로 빠르게 전이된다. 신뢰를 형성한 가해자들은 신체 사진이나 영상을 요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결국 직접적인 만남을 유도해 강제추행이나 강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 중 상당수가 온라인 그루밍 이후 실제 성폭행으로 이어진 사례였다. 한 번 대화가 시작되면 범행이 멈추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가해자 한 명이 여러 명의 아이를 동시에 노리는 연쇄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빈번하게 확인됐다.

 


가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성범죄 전력이 있는 동종 전과자들이었으며, 집행유예 기간 중에 또다시 범행을 저지른 사례도 발견됐다. 이들은 아이들의 경제적 결핍보다는 정서적 외로움을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하며, 돈이나 물건을 미끼로 던지기보다 감정적인 지지를 보내는 척하며 아이들을 옭아맸다. 일단 심리적 지배하에 놓인 아이들은 자신이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가해자의 요구에 순응하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중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처단은 여전히 관대하다는 비판이 거세다. 분석된 사건의 가해자 절반가량은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사회로 복귀했다. 피해 아동들은 여전히 가해자와 마주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노출되어 있지만, 범죄자들은 가벼운 처벌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다. 온라인 성착취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함께 플랫폼 기업들의 책임 강화, 그리고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한 시점이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