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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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곧 생존이었다" 김선영이 본 렘피카의 민낯

 산업화의 상징인 에펠탑이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순간, 관객은 20세기 초 격동의 파리로 소환된다. 뮤지컬 '렘피카'는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를 뚫고 살아남아 아르데코 양식의 정점을 찍은 실존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불꽃 같은 삶을 조명한다. 마돈나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그녀의 작품 이면에는, 화려한 예술가의 명성보다 더 치열했던 한 여성의 생존 본능과 모순적인 욕망이 얽혀 있다.

 

이번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 김선영은 타마라를 단순한 천재 화가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렘피카가 처했던 냉혹한 현실에 주목하며, 그림 한 점이 곧 가족의 생활비가 되어야 했던 절박함이 예술적 성취의 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순수 예술의 고결함만을 쫓기보다 스스로를 브랜드화하고 이미지 전략을 세워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난 렘피카의 행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품은 렘피카가 파리라는 낯선 도시에서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격정적인 관계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미래주의의 영향 아래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면서도, 내면의 욕망을 일깨운 존재인 라파엘라와의 만남은 그녀의 예술을 완성하는 동시에 평온했던 가정생활을 뒤흔드는 균열이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의 파고는 난도 높은 음악과 박진감 넘치는 전개를 통해 무대 위에 구현된다.

 

주연 배우에게 이번 무대는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승리의 기록이다. 공연 준비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골절 부상을 입고 수술대에 올랐던 김선영은, 재활에만 반년이 걸린다는 진단을 뒤로하고 기적처럼 무대에 복귀했다. 부상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며 배역에 몰입한 그녀의 투혼은, 생존을 위해 붓을 들었던 렘피카의 강인한 생명력과 맞물려 관객들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중년의 배우로서 느끼는 고민과 성찰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40대와 50대를 지나며 겪은 예술적 고뇌와 체력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후배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멋진 여성 캐릭터를 완성하겠다는 포부는 렘피카의 비범함 속에 숨겨진 보편적인 인간미를 찾아내게 했다. 매 순간의 감정이 모순될지라도 그 찰나의 진실함을 믿고 연기한다는 그녀의 철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거대한 모순의 집합체임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시아 초연이라는 부담감과 생소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어려움 속에서도, '렘피카'는 예술과 삶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증명하며 순항 중이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던 한 여성의 투쟁은, 2026년의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기복 없는 완주를 꿈꾸는 배우의 다짐과 함께, 렘피카의 캔버스는 공연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 위에서 찬란하게 빛날 예정이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