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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4세의 굴욕, 본인 인증 못 해 통화 종료

 전 세계 10억 가톨릭 신자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 레오 14세가 미국의 한 은행 고객센터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강제 종료당하는 굴욕 아닌 굴욕을 겪었다. 이 놀라운 사연은 교황과 수십 년간 친분을 쌓아온 톰 매카시 신부가 최근 미국 일리노이주 네이퍼빌에서 열린 신자 모임에서 공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매카시 신부는 교황이 선출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바티칸에서 직접 미국 고향의 은행에 전화를 걸어 개인적인 금융 업무를 처리하려다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일리노이주 돌턴 출신인 레오 14세 교황은 본명인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로 전화를 걸어 계좌에 등록된 주소와 연락처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직원이 요구하는 각종 보안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하며 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러나 직원은 전화상 답변만으로는 본인 확인이 불충분하다며, 규정상 반드시 은행 지점을 직접 방문해야만 정보 변경이 가능하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바티칸에 머물고 있는 교황으로서는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요구였다.

 


난처해진 교황은 자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며 보안 질문에 모두 답했으니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직원이 은행 규정을 이유로 거듭 사과하며 거절하자, 교황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현재 신분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가 교황 레오라고 말하면 상황이 좀 달라질 수 있겠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은행 직원은 이를 장난전화로 간주했는지 즉시 통화를 끊어버렸다.

 

이 일화가 공개되자 현장에 있던 신자들은 폭소를 터뜨렸으며, 매카시 신부는 이후 언론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해당 사연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상황임을 재차 확인했다. 교황 레오 14세는 시카고 인근 소도시에서 태어나 페루 주교를 거쳐 바티칸의 핵심 보직을 역임한 인물로, 평소 소탈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건 역시 교황이 비서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사적인 업무를 처리하려다 발생한 해프닝이라는 점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과거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 직후 자신의 호텔 숙박비를 직접 계산하고 짐을 챙겨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 레오 14세의 일화도 종교적 권위 뒤에 숨은 평범한 일상을 조명한다. 현대 사회의 엄격한 행정 시스템과 보안 규정 앞에서는 교황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안겼다. 비록 바티칸 대변인실은 이번 보도에 대해 즉각적인 논평을 내놓지 않았으나, 매카시 신부는 교황의 전화를 끊은 직원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며 농담을 덧붙였다.

 

결국 교황의 계좌 정보 변경 문제는 은행장과 친분이 있는 또 다른 신부가 중재에 나서면서 우여곡절 끝에 해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해프닝은 디지털 보안이 강화된 현대 사회에서 신원을 증명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인물도 우리와 같은 일상의 벽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교황의 전화를 끊어버린 무명의 은행 직원은 본의 아니게 전 세계 가톨릭 역사에 남을 독특한 일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