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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도 넘겼다…KIA '5만 달러' 아데를린의 무력시위

 KIA 타이거즈가 부상 악재 속에서 긴급 수혈한 대체 외국인 타자 아데를린 로드리게스의 방망이가 예사롭지 않다. 아데를린은 지난 6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멀티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전날 데뷔전 첫 타석 홈런에 이어 이틀 연속 담장을 넘기는 괴력을 과시한 그는 단 2경기 만에 자신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각인시켰다. 특히 이날 홈런 중 하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좌완 투수 류현진의 체인지업을 공략해 만든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아데를린의 초반 기세는 KBO리그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진기록으로 이어지고 있다. 리그 데뷔 이후 기록한 세 개의 안타가 모두 홈런으로 연결된 사례는 역대 다섯 번째에 불과하다. 타이거즈 구단 역사상으로는 1999년 샌더스 이후 무려 27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 첫 두 타석에서 삼진과 뜬공으로 물러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으나, 세 번째 타석에서 류현진의 실투를 놓치지 않고 중앙 담장을 넘기는 솔로포를 쏘아 올렸다. 이어 9회에도 상대 투수의 빠른 공을 밀어쳐 다시 한번 중월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3호 홈런 고지에 올라섰다.

 


이번 영입은 KIA의 발 빠른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인 결과다. 시즌 초반 불펜진의 부상 공백에 이어 주전 외국인 타자 해럴드 카스트로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이탈하자, 구단은 대체 외국인 선수 제도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후보군을 검토한 끝에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베테랑 내야수 아데를린을 낙점했다. 6주라는 짧은 계약 기간과 5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아데를린은 입국 직후 비자 발급 절차를 신속히 마치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

 

1991년생인 아데를린은 풍부한 경험을 갖춘 '저니맨' 스타일의 타자다. 미국 마이너리그를 시작으로 일본프로야구(NPB)와 멕시코 리그 등 다양한 환경에서 야구를 경험하며 쌓은 노련미가 한국 무대 적응의 밑거름이 되었다. 올해 멕시코 리그에서도 3할대 타율을 유지하며 타격감을 조율해온 그는 한국 투수들의 유인구에도 쉽게 속지 않는 선구안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야구를 이미 경험해본 이력이 한국 특유의 세밀한 투수 리드에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장의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다. 이범호 KIA 감독은 아데를린을 향해 야구에 임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영리한 선수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힘으로만 승부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을 읽고 자신의 스윙을 가져가는 세밀함을 갖췄다는 평가다. 특히 홈런 이후 다음 타석에서 보여준 참을성과 공을 고르는 능력은 그가 단순한 거포 이상의 가치를 지녔음을 증명한다. 사령탑의 신뢰 속에 아데를린은 팀 타선의 중심을 잡아주는 핵심 자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KIA는 아데를린의 합류로 카스트로의 공백을 메우는 것을 넘어 타선의 파괴력을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단기 계약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매 경기 결승타급 활약을 펼치는 그의 모습은 팀 전체 사기 진작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의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6주 후 정식 계약 전환에 대한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아데를린이 보여주는 홈런 쇼가 일시적인 돌풍에 그칠지, 아니면 KIA의 시즌 전체 판도를 바꿀 결정적인 승부수가 될지 야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