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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 美 휴전안 '항복 문서' 거부

 미국과 이란 사이의 종전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서 레바논 사태라는 돌발 변수를 만나 장기 표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간의 평화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며 특유의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으나, 현장의 기류는 싸늘하기만 하다. 특히 레바논 내 친이란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미국의 중재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어렵게 마련된 중동 평화의 불씨가 다시 꺼질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레바논의 평화 권리를 강조하며 헤즈볼라 측과의 접촉 사실을 과시했지만, 실질적인 돌파구는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앞서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대표단을 소집해 고위급 회담을 열고 휴전 이행에 합의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해당 합의안에는 헤즈볼라가 공격을 멈추고 레바논 남부 리타니강 이남 지역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이 합의를 이스라엘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 문서라고 규정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나임 카셈 헤즈볼라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군의 완전한 철수가 선행되지 않는 한 저항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레바논 당국에 휴전안 거부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이스라엘 역시 안보를 이유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사태 해결은 더욱 난망하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북부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레바논 남부 완충지대에 군 주둔을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헤즈볼라의 군사 기반 시설을 무력화하기 위한 작전도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양측은 이미 지난 4월에도 미국의 중재로 휴전에 합의한 전례가 있으나, 이스라엘이 자위권을 내세워 군사 행동을 지속하면서 합의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이러한 불신이 쌓이면서 새로운 협상안에 대한 동력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레바논 문제는 이제 미국과 이란 간의 거시적인 종전 협상을 가로막는 핵심 쟁점이 되었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단순한 무장단체가 아닌 자국 안보의 핵심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헤즈볼라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종전 합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란 내 강경파 매체들은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이라크 정세가 모두 하나의 안보 방정식으로 묶여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며칠 사이 미국과 이란 사이의 외교적 메시지 교환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협상 결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재국들의 발걸음도 다시 분주해지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파키스탄 등 주변국들이 이란 정부 관계자들과 잇따라 접촉하며 이해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란 외무부 측은 국익이 보장되지 않는 합의에는 서명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공격 중단 외에도 경제 제재 해제와 동결 자산 반환,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 인정 등 고난도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있다. 반면 미국은 핵 프로그램 제한과 해협의 완전 개방을 우선시하고 있어 양국의 간극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레바논 남부에서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물리적 충돌은 미·이란 종전 협상의 속도를 결정짓는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중동 평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서두르고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종교적·정치적 이해관계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고 국제 사회의 중재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중동은 다시 한번 대규모 무력 충돌과 장기적인 외교 교착 상태라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정약용의 500권 저술 산실, 다산초당의 인문학

는 결과가 아니라, 발길 닿는 구간마다 깃든 땅의 역사와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과정에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조선의 대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고립과 깊은 사유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여행자들을 이끈다. 약 17.5km에 달하는 이 길의 중심에는 야생 차나무가 무성해 '다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만덕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강진 유배 시절 다산의 삶은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와 그곳에서 만난 혜장선사와의 인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05년 봄, 유배객 신분으로 처음 백련사를 찾은 정약용은 주지였던 혜장과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지적인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08년 다산이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이 수시로 오갔던 800m의 산길은 오늘날 '우정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보 여행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다산초당은 단청조차 없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지만, 그곳에 머문 11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조차 그의 사유의 깊이를 가둘 수 없었음을 증명하듯, 초당 곳곳에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이 흐른다. 만덕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은 고독한 유배객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지천에 널린 야생 차나무는 그의 호가 된 '다산'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강진을 지나 해남으로 발길을 옮기면 달마산 미황사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40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2002년 법조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 헬기조차 접근하기 힘든 험지에 암자를 세우기 위해 산 아래에서 자재를 미리 깎고 단청까지 칠해 올라와 조립한 '사전 제작 방식'의 서사는 수행자의 지독한 정진을 짐작하게 한다.한 칸 남짓한 작은 규모의 도솔암은 거대한 바위 성벽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남해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으로, 암자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바다와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밀려오는 날이면 마치 구름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의 거처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작은 공간 안에 고요와 수행의 서사를 압축해 놓은 도량의 품격은 길 위에서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충분하다.코리아둘레길 남도 구간은 이처럼 유학자의 고뇌와 수행자의 원력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성지다. 길은 단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을 따라 걷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된다. 완주라는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은 우리 국토가 간직한 깊은 서사를 들려준다. 만덕산의 차 향기와 달마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여정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성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