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Global

레바논, 이스라엘 침공에 내전 위기 고조

 중동의 화약고 레바논이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의 격렬한 충돌로 인해 다시 한번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난 3월 이란 전쟁의 서막과 함께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향해 포문을 열면서 시작된 이번 위기는 레바논 전역을 극심한 압박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스라엘군은 헤즈볼라의 거점인 남부 지역은 물론 수도 베이루트 인근까지 공습 범위를 넓히며 조직원 섬멸을 위한 무차별적인 추격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군사적 긴장은 레바논 내부의 해묵은 종파 간 불신을 자극하며 사회적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발생한 10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은 레바논 사회의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떠올랐다. 고향을 잃은 시아파 무슬림들이 비교적 안전한 기독교나 수니파 거주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이들이 이스라엘의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지역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베이루트 거리를 가득 메운 난민 텐트는 현재 레바논이 처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전을 갈망하는 난민들과 이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원주민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과거 15년 동안 지속되었던 참혹한 내전의 기억을 소환하며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의 존립을 책임져야 할 레바논 정부는 사실상 식물 상태에 빠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자국 통화는 가치를 잃어 시장에서는 달러가 통용되고 있으며, 전력 공급조차 하루 몇 시간에 불과할 정도로 공공 서비스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물리적 강제력의 부재다. 레바논 정부군은 자국 영토 내에서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에 밀려 세 번째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방공 시스템이나 공격 자산이 전무한 상태이며, 병사들은 생계를 위해 부업에 나설 정도로 군 기강과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휴전 합의안 역시 레바논 내부에서는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다. 합의안은 레바논 정부군이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하고 통제권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다. 오히려 이러한 요구는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반대 세력 사이의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 세력이 약화되었던 헤즈볼라가 최근 재무장을 마치고 정부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며 대담한 행보를 보이자, 이들을 군사적으로 억제하려는 시도가 자칫 대규모 내부 유혈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레바논의 역사는 시아파와 수니파, 기독교 세력 등 다양한 종파가 얽히고설킨 갈등의 기록이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내전 기간 동안 레바논은 종파별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침공과 헤즈볼라의 무장 투쟁, 그리고 급격히 심화되는 종파 간 대립은 당시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금 드리우고 있다. 분열을 조장하는 극단주의 세력들이 각 지역에서 결집하면서 레바논 사회는 수십 년 만에 가장 위험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레바논의 운명은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와 내부 종파 갈등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하려는 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레바논 국민들은 또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국제 사회의 중재 노력이 실질적인 평화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레바논은 과거의 참혹했던 내전보다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무너진 국가 시스템과 깊어진 종파의 골 사이에서 레바논은 지금 거대한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 놓여 있다.

 

 

 

정약용의 500권 저술 산실, 다산초당의 인문학

는 결과가 아니라, 발길 닿는 구간마다 깃든 땅의 역사와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과정에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조선의 대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고립과 깊은 사유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여행자들을 이끈다. 약 17.5km에 달하는 이 길의 중심에는 야생 차나무가 무성해 '다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만덕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강진 유배 시절 다산의 삶은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와 그곳에서 만난 혜장선사와의 인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05년 봄, 유배객 신분으로 처음 백련사를 찾은 정약용은 주지였던 혜장과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지적인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08년 다산이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이 수시로 오갔던 800m의 산길은 오늘날 '우정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보 여행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다산초당은 단청조차 없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지만, 그곳에 머문 11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조차 그의 사유의 깊이를 가둘 수 없었음을 증명하듯, 초당 곳곳에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이 흐른다. 만덕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은 고독한 유배객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지천에 널린 야생 차나무는 그의 호가 된 '다산'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강진을 지나 해남으로 발길을 옮기면 달마산 미황사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40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2002년 법조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 헬기조차 접근하기 힘든 험지에 암자를 세우기 위해 산 아래에서 자재를 미리 깎고 단청까지 칠해 올라와 조립한 '사전 제작 방식'의 서사는 수행자의 지독한 정진을 짐작하게 한다.한 칸 남짓한 작은 규모의 도솔암은 거대한 바위 성벽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남해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으로, 암자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바다와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밀려오는 날이면 마치 구름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의 거처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작은 공간 안에 고요와 수행의 서사를 압축해 놓은 도량의 품격은 길 위에서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충분하다.코리아둘레길 남도 구간은 이처럼 유학자의 고뇌와 수행자의 원력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성지다. 길은 단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을 따라 걷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된다. 완주라는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은 우리 국토가 간직한 깊은 서사를 들려준다. 만덕산의 차 향기와 달마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여정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성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