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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수마노탑, 여름 숲의 국보

 강원도 정선의 여름은 민둥산의 초록 물결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정암사의 고즈넉한 풍경에서 완성된다. 민둥산역에서 차로 15분이면 닿는 거리에 위치한 정암사는 당일치기 여행자들에게도 부담 없는 최고의 연계 관광지다. 이곳의 상징이자 핵심은 단연 산비탈 가파른 곳에 우뚝 솟은 8층 석탑인 '수마노탑'이다. 국보로 지정된 이 탑은 주변 식생이 가장 울창해지는 여름철에 그 신비로움이 극대화된다. 짙푸른 숲을 배경으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석탑의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수마노탑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탑 내부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정암사 법당 안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대신 법당은 탑이 위치한 산비탈 방향으로 커다란 창을 내어, 신도들이 탑을 향해 직접 불공을 드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한국 사찰 건축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구조로, 보이지 않는 곳에 깃든 성스러움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대변한다. 탑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는 사찰 부지에서 약 10분 정도 산길을 올라야 하는데, 민둥산 못지않게 경사가 가파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정암사 일대의 자연환경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유산이다. 사찰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열목어 서식지'로 명성이 높다. 차가운 물에서만 사는 열목어의 최남단 서식지라는 학술적 가치 덕분에 이곳의 물줄기는 엄격하게 보호받고 있다. 여름철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사찰 경내의 산책로는 민둥산 등반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맑은 물속을 유영하는 열목어의 움직임은 정암사가 지닌 생명력과 청정함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준다.

 

정선 여행의 묘미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주변 명소들과의 조화에 있다. 차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국내 최고 높이의 고개인 만항재는 겨울의 환상적인 설경으로 이름나 있고, 하이원리조트와 연결된 운탄고도는 봄의 야생화와 가을의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하지만 생명력이 꿈틀대는 여름의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정암사다. 고산 지대의 시원한 공기와 역사가 숨 쉬는 국보 석탑, 그리고 천연기념물 계곡이 어우러진 이곳은 정선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는 필수 코스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민둥산의 역동적인 산행 뒤에 정암사의 평온함을 배치하는 일정을 추천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민둥산의 기억이 정암사의 고요한 종소리와 계곡물 소리에 씻겨 내려가는 경험은 정선 여행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수마노탑으로 향하는 짧지만 강렬한 오르막길 끝에서 마주하는 정암사 전경은, 왜 수많은 이들이 이 험한 산비탈에 탑을 세우고 마음을 기댔는지를 말없이 설명해 준다.

 

정암사는 역사와 자연, 그리고 신앙이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든 공간이다. 수마노탑의 정교한 석재 하나하나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고, 그 주위를 감싸는 여름 숲은 매년 새로운 생명을 피워낸다. 열목어가 노니는 맑은 계곡부터 하늘과 맞닿은 국보 석탑까지, 정암사가 품은 보물들은 민둥산을 찾은 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선사한다. 정선의 여름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다면, 민둥산의 초록 들판을 지나 정암사의 짙은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이 좋다.

 

판소리와 포크의 만남…구례 가을밤 울린 ‘시인의 마을’

추임새와 박수가 이어졌다. 전통 판소리의 깊은 울림에 이어 익숙한 포크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노래와 함께 호흡하며 구례의 가을밤을 즐겼다.지난 17일 밤 열린 구례 동편제소리축제에서는 지역 명창들의 판소리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소리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무대를 선사했다.이날 구례 명창들의 공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박정선 명창의 ‘적벽가’였다. 박 명창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힘 있는 소리로 풀어냈다.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관객들은 추임새와 박수로 소리꾼의 무대에 호응했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긴장감이 무대를 채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 속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소리꾼의 목소리와 몸짓에 관객의 반응이 더해지며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함께 만들어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공연의 분위기는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무대에 오르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오랜 시간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해 온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마을’의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노래의 첫 소절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반응에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노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겼다. 앞선 판소리 무대에서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며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집중했다. 한 곡의 노래가 오랜 세월 쌓인 기억을 불러내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정태춘·박은옥은 ‘북한강에서’ 등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며 공연의 여운을 이어갔다.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국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이를 전하는 목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판소리와 포크음악은 표현 방식과 음악적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소리와 이야기로 전해왔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며 청중과 소통해 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이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다.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으로, 동편제 판소리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역 명창들의 전통 소리를 감상한 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만나는 구성은 이번 축제의 특별한 장면으로 남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첨단 조명과 대형 LED 화면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오래된 판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경계보다 서로 다른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감동을 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무대였다.전통문화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장르와 어우러질 때, 전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판소리의 추임새와 대중가요를 향한 박수가 같은 밤에 이어진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구례 동편제소리축제의 가을밤은 그렇게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함께 만드는 공연장으로 변했다. 명창의 소리에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를 외쳤고, ‘시인의 마을’이 시작되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출발한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고, 관객들은 그 울림을 함께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