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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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그림, 갤러리 점령한 소녀들

 과거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동그란 얼굴과 커다란 눈망울의 미소녀 도상이 이제는 현대미술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전시장 정중앙에 섰다. 어린이들의 하위문화나 소수의 취향으로 치부되던 이 이미지들은 만화적 감수성을 공유하며 성장한 세대들이 미술 시장의 주역으로 떠오름에 따라 팝아트의 핵심적인 요소로 재평가받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갤러리 두 곳에서는 미소녀라는 공통된 소재를 각기 다른 철학으로 풀어낸 작가들의 전시가 열려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먼저 용산구 리만머핀 갤러리에서는 일본 팝아트의 선구자 미스터(Mr.)가 10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았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제자로도 잘 알려진 그는 1990년대 데뷔 이후 줄곧 미소년과 미소녀 캐릭터를 통해 일본 특유의 '모에' 문화를 탐구해 왔다. 모에는 캐릭터에 대한 강렬한 호감과 애정을 뜻하는 용어로, 미스터의 작품 속 소녀들은 만화적 반짝임 효과와 화려한 색채를 입고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소녀라는 존재가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를 통해 보는 이에게 즉각적인 기쁨을 선사하고자 한다.

 


하지만 미스터의 화면이 단순히 귀여움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캔버스 배경을 채운 거친 낙서와 회색빛 톤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작가가 도입한 스타일로, 일본 사회 이면에 숨겨진 불안과 어두운 풍경을 투영한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를 패러디한 타이포그래피와 캐릭터가 뒤섞인 화면은 동시대 일본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귀여운 외양 속에 사회적 비판 의식을 담아낸 그의 전시는 오는 8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종로구 노화랑에서는 한국의 이사라 작가가 고전 동화 속 마법소녀를 연상시키는 '원더랜드'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미스터의 소녀들이 현대 애니메이션의 세련미를 갖췄다면, 이사라의 캐릭터는 '캔디캔디'나 '요술공주 밍키'를 보고 자란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유토피아 세계관을 담고 있다. 작가는 지난 15년간 회화와 동화책을 통해 구축해 온 자신만의 가상 세계를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입체 조각으로 구현해 내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

 


이사라 작품의 백미는 단연 캐릭터의 커다란 눈동자다. 수많은 물감 층을 쌓아 올린 뒤 날카로운 칼로 표면을 긁어내 완성한 눈 속에는 별과 하트 모양의 도형들이 정교하게 채워져 있다. 이는 관람객이 현실을 잊고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작가는 원더랜드의 핵심 가치로 '동심'을 꼽으며, 화려하고 호기심 가득한 꿈의 공간을 통해 성인이 되며 잊고 지냈던 순수한 감각과 행복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한다.

 

서브컬처에서 출발한 미소녀 도상은 이제 단순한 모방을 넘어 현대인의 심리적 허기를 채워주는 예술적 도구로 진화했다. 미스터의 사회적 성찰이 담긴 캐릭터와 이사라의 순수한 동심이 깃든 조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미술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만화적 상상력이 캔버스 위에서 고귀한 예술로 탈바꿈하는 현장은 오는 23일까지 노화랑에서, 8월 중순까지 리만머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대중문화와 순수미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흐름은 당분간 미술계의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사진 찍다 걷다 쉬다, 문경새재 하루는 너무 짧다

나란히 남아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숲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 너머에 가려졌던 길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난다.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주요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물건을 나르는 상인, 임지로 향하는 관리들이 이곳을 넘었다. 여행객에게는 여유로운 산책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출세, 공무가 걸린 이동로였다. 같은 흙길 위에 서로 다른 사연이 포개진 셈이다.이 길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설은 세 관문이다. 아래쪽부터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 자리하며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을 형성한다. 지금은 숲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 명소로 눈길을 끌지만, 처음부터 경관을 위해 세운 건축물은 아니다. 관문과 성벽의 배치에는 외적의 이동을 막으려 했던 군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방어시설 정비의 중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문경새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됐고, 1594년 제2관문 일대에 방어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숙종 대에 제1·제3관문과 성벽이 더해지며 방어체계가 갖춰졌다. 세 관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전란 이후 국가가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관문 사이에서는 전쟁과는 다른 역사를 만난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교귀정은 신임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 관찰사가 업무를 인계하던 장소다. 조령원 터는 공무로 길을 나선 이들의 숙박을 지원했던 시설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통·숙박 기반처럼, 옛길에도 사람들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문학과 생활문화 역시 새재를 이해하는 열쇠다. 길을 지나간 문인들의 시에는 산세를 바라보는 감흥과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전해지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들려준다. 성문과 정자가 국가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시와 노래는 그 사이를 걸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여행객이 이러한 흔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데는 흙길의 역할도 크다. 약 6.5㎞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 주변을 살피며 걷게 한다. 관문 앞에서는 성벽을 올려다보고, 유적 주변에서는 안내문을 읽으며 걸음을 늦출 만하다. 전 구간을 완주하기보다는 체력과 일정에 맞춰 돌아올 지점을 정하는 편이 좋다.가을의 문경새재를 즐기는 방법은 단풍 명소를 찾아 사진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숲 사이에 왜 관문이 들어섰는지, 관리와 상인들은 어디에서 쉬었는지 생각하며 걸으면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 문경새재의 매력은 아름다운 자연과 구체적인 삶의 기록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