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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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의 샤일록… 악당인가 피해자인가

 한국 연극계를 지탱해 온 두 거장, 신구와 박근형이 셰익스피어의 고전 '베니스의 상인'으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를 압도했다. 오경택 연출이 메가폰을 잡은 이번 공연은 원작의 방대한 구성을 2막 19장으로 압축하면서도 본연의 메시지를 날카롭게 살려냈다. 140분간 펼쳐진 열연 끝에 1,200명의 관객은 일제히 기립해 아흔 살의 신구와 여든여섯 살의 박근형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고전을 통해 연극의 본질을 증명하겠다는 원로 배우들의 의지는 무대 위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번 작품은 샤일록을 단순한 악당으로 규정하지 않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입체적 인물로 그려낸 점이 특징이다. 오 연출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하여 정의와 공정, 자비의 양가성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원작에서 짧게 언급된 샤일록의 강제 개종 장면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여 배치함으로써 그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강조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기독교인들의 위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샤일록 역을 맡은 박근형은 분노와 슬픔을 오가는 노련한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았다. 자신을 멸시하는 안토니오를 향한 깊은 증오를 삭이면서도, 딸 제시카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주며 인간적인 샤일록을 구현했다. 전 재산을 잃고 몰락하는 순간 보여준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은 관객들의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박근형의 연기는 샤일록이 왜 그토록 잔혹한 복수를 꿈꿀 수밖에 없었는지 그 내면의 상실과 좌절을 호소력 있게 대변했다.

 

딸 제시카의 캐릭터 역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재탄생했다. 단순히 사랑을 찾아 도망친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개종을 선택했으나 결국 이방인으로 떠도는 주변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그녀는 인색한 아버지를 떠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몰락한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책임감을 느끼며 그를 품어 안는 성숙한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안토니오와 그의 무리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즐기는 위선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재판을 주관하는 공작으로 분한 신구는 적은 대사와 움직임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 샤일록을 향해 자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대사는 배우로서 걸어온 70년 인생의 무게와 겹쳐지며 객석에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신구의 목소리는 정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판결이 과연 진정한 자비를 담고 있는지 묻는 극의 핵심 주제를 관통했다. 그의 절제된 연기는 대극장의 공기를 단숨에 장악하며 거장의 품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대극장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화려한 연출 기법도 돋보였다. 와이어를 이용한 공중 퍼포먼스와 객석에서 튀어나오는 배우들의 합창은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와 포셔의 저택 등을 입체적으로 구현한 무대 장치는 공간의 순환을 매끄럽게 도왔다. 특히 압도적인 규모로 제작된 재판정 세트는 작품의 절정인 판결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고전의 깊이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룬 이번 공연은 오는 8월 9일까지 관객들과 만난다.

 

 

 

해외여행 새 코스 된 ‘현지 장보기’

이 확산하는 모습이다.최근 여행업계에서는 이를 ‘식료품점 관광’으로 부른다. 해외 슈퍼마켓을 단순한 장보기 공간이 아니라 여행 코스의 하나로 즐기는 방식이다. 현지인들이 자주 먹는 간식, 음료, 조미료, 즉석식품 등을 직접 고르고 맛보며 여행지의 생활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다.영국 BBC는 글로벌 호텔 기업 힐튼의 ‘2026년 트렌드 보고서’를 인용해 여행객 10명 중 7명 이상이 해외 식료품점 방문을 즐긴다고 전했다. 미국 여행 전문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도 ‘식료품점 관광’을 2026년 주목할 여행 트렌드로 꼽았다. 마트 방문이 더 이상 여행 중 남는 시간에 들르는 일정이 아니라, 목적지에서 해봐야 할 경험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이 같은 흐름은 업계의 움직임에서도 확인된다. 핀란드의 대형 식료품 체인 K-슈퍼마켓은 자사 매장을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에 관광 명소로 등록했다. 일부 매장은 옥상 벌통에서 직접 생산한 꿀을 판매하거나, 지역 특색을 살린 수제 맥주 라인업으로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평범한 장보기 공간이 지역성과 체험 요소를 갖춘 관광 콘텐츠로 변신한 셈이다.여행객들이 해외 마트에서 찾는 것은 거창한 상품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편의점 달걀 샌드위치, 스페인에서는 피스타치오 스프레드, 미국에서는 트레이더 조의 시즈닝처럼 현지에서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가 인기다. 저렴하지만 개성이 뚜렷하고, 여행 후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특히 젊은 세대는 SNS를 통해 현지 먹거리 탐색을 여행의 핵심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해외 편의점 간식, 마트 추천템, 길거리 노점 음식 등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스낵패킹’이라는 문화도 확산하고 있다. 스낵패킹은 여행지에서 현지 간식과 음료를 찾아다니고, 이를 먹어보거나 챙겨 오는 방식의 여행 소비를 뜻한다.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2026 글로벌 여행 트렌드 보고서’에서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MZ세대의 대다수는 현지 음식 체험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여긴다고 답했다. 현지 간식을 찾는 장소로는 길거리 노점, 빵집, 슈퍼마켓 등이 많이 꼽혔다. 유명 레스토랑 예약보다 현지인이 자주 가는 생활 공간을 찾아가는 데 더 큰 흥미를 느끼는 여행객이 늘고 있는 것이다.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한국 편의점은 이미 하나의 체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바나나우유, 컵라면, 삼각김밥, 얼음컵 음료 조합 등은 SNS에서 자주 소개되는 인기 콘텐츠다. 바나나우유와 파우치형 커피를 얼음컵에 섞어 마시는 이른바 ‘뚱바라떼’도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시도해볼 만한 편의점 메뉴로 공유되고 있다.현지 슈퍼마켓 관광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비용 부담이 낮으면서도 여행지의 특징을 쉽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급 식당이나 유명 관광지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마트나 편의점은 누구나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진열된 과자, 조미료, 즉석식품, 음료만 봐도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떤 맛을 좋아하고 어떤 방식으로 식생활을 즐기는지 엿볼 수 있다.소비자 심리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익숙하지만 낯선 경험’으로 설명한다.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서는 과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익숙하다. 하지만 진열대에 놓인 상품, 포장 디자인, 식재료 조합, 가격표는 모두 다르다. 익숙한 행동 속에서 낯선 문화를 발견하는 재미가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다만 마트와 편의점이 관광지화되면서 부작용도 나타난다. 일본 가와구치코의 한 로손 편의점은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사진 명소로 알려지며 관광객이 몰렸다. 편의점 지붕 위로 후지산이 보이는 구도가 SNS에서 퍼지면서 방문객이 급증했고, 인근 교통 혼잡과 무단 촬영 문제가 이어졌다. 결국 당국은 경비원과 교통 통제 인력을 배치했고, 사진 촬영을 막기 위한 대형 가림막까지 설치했다.전문가들은 현지 슈퍼마켓 관광이 여행의 새로운 즐거움이 될 수 있지만, 그 공간이 지역 주민의 일상 공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사진 촬영이나 대량 구매, 통행 방해 등으로 현지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해외여행의 기준은 달라지고 있다. 유명 명소를 찍고 돌아오는 여행에서, 현지의 작은 일상을 맛보고 기록하는 여행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슈퍼마켓과 편의점은 그 변화의 가장 가까운 현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