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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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 3할 수성, 샌프란시스코는 3연패 수렁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이정후가 패배의 문턱에서 팀을 구해내는 극적인 안타를 터뜨렸으나, 팀의 끝내기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정후는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카우프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시합에 6번 타자 우익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경기 막판 집중력을 발휘하며 2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간 이정후는 시즌 타율 0.303를 유지하며 리그 정상급 교타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날 이정후의 방망이는 경기 초반 다소 무거웠다. 2회초 첫 타석에서 상대 선발 마이클 와카의 초구를 공략했으나 1루수 땅볼로 돌아섰고, 4회와 7회에도 각각 뜬공과 땅볼로 물러나며 아쉬움을 남겼다. 샌프란시스코 타선 전체가 캔자스시티 투수진에 막혀 8회까지 단 1점에 그치는 빈공에 허덕이는 사이, 경기는 1대 3으로 뒤진 채 마지막 9회초로 접어들었다. 캔자스시티 홈 관중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기립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이정후가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패색이 짙던 9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정후는 침착하게 볼카운트 싸움을 이어갔다. 그는 상대 투수의 4구째를 정확히 받아쳐 유격수 키를 넘기는 중전 안타를 만들어내며 불씨를 살렸다. 이 안타는 곧바로 팀의 동점 드라마로 연결됐다. 후속 타자 윌리 아다메스가 우측 담장을 넘기는 극적인 투런 홈런을 쏘아 올렸고, 1루에 있던 이정후가 홈을 밟으며 승부는 순식간에 3대 3 원점이 됐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진 9회말 수비에서 1사 1, 3루 위기에 몰린 샌프란시스코는 상대 타자 로프틴의 기습적인 번트 수비에 실패하며 무너졌다. 1루수 브라이스 엘드리지가 전진 수비를 펼치며 포구를 시도했으나 공을 한 번에 잡지 못하는 실책성 플레이를 범했고, 그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며 경기는 3대 4 끝내기 패배로 마무리됐다. 이정후의 천금 같은 안타와 득점이 팀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한 통한의 순간이었다.

 


이번 패배로 샌프란시스코는 3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시즌 성적 42승 58패를 기록하게 됐다.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4위에 머물며 포스트시즌 진출권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반면 캔자스시티는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며 귀중한 승리를 챙겼으나, 여전히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최하위에 머물러 있어 양 팀 모두 갈 길 바쁜 행보를 이어가게 됐다.

 

비록 팀은 졌지만 이정후 개인에게는 수확이 있는 경기였다. 후반기 시작과 함께 몰아치기 안타를 선보이며 타격감을 조율 중인 이정후는 92경기 만에 105안타를 돌파하며 연착륙을 넘어 팀의 핵심 타자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5개의 홈런과 14개의 도루를 곁들이며 공수주 전반에서 기여하고 있는 이정후가 침체된 팀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샌프란시스코의 가을야구 희망을 살려낼 수 있을지 팬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은과 도자기의 충돌…운암산 가마터의 비극

규모의 분청사기 가마가 밀집해 있었으며, 이는 곧 일본군에게 거부할 수 없는 표적이 되었다. 흔히 임진왜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욕이나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국제 경제의 패권을 쥐고 있던 '은'과 '도자기'를 둘러싼 거대한 충돌이 자리 잡고 있었다.당시 동북아시아의 경제 질서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조공 무역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6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하듯 캐낸 은은 유럽을 거쳐 명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명나라의 비단과 도자기는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사치품이었고, 은을 기축통화로 사용하던 명나라는 전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역할을 했다. 세금조차 은으로 납부하게 했던 명나라의 경제 체제는 주변국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러한 명 중심의 독점적 무역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일본의 비약적인 은 생산량 증가였다. 1526년 일본 시네마현의 이와미 은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일본은 단숨에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하는 은 강국으로 부상했다. 연간 20만kg에 달하는 은을 손에 쥔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중심의 경제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통해 직접 교역을 통제하자, 일본은 무역로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돌파구로 전쟁을 선택했다.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 바로 도자기다. 당시 도자기는 단순한 그릇을 넘어 오늘날의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수출 품목이었다. 일본은 은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고품질의 도자기로 바꿀 기술력이 부족했다. 반면 조선은 고흥 운암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세계 최고 수준의 분청사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수많은 도공을 납치하고 가마터를 파괴한 것은 경제적 부를 창출할 '기술 자본'을 확보하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고흥 운암산 가마터는 이러한 비극적 역사의 산증인이다. 왜군은 남해안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운암산의 분청사기 생산 기반을 철저히 유린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던 분청사기는 조선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역동적인 미감을 갖추고 있어 일본 다도인들 사이에서 보물 대접을 받았다. 전쟁의 이면에 숨겨진 은과 도자기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때, 고흥의 가마터가 왜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되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오늘날 운암산 가마터에 대한 재조명은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한층 넓혀준다. 단순한 침략과 방어의 역사를 넘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국제 통화인 은을 매개로 충돌했던 거대한 경제사적 사건으로 전쟁을 재해석하게 한다. 고흥군은 현재 산재한 가마터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잊혔던 분청사기의 고향 운암산은 이제 400여 년 전 국제 정세의 파고를 증언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