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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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깔고 보는 연극, 180분의 기다림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들이 의자가 아닌 돗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된다. 세종문화회관의 실험적 시즌인 ‘싱크 넥스트 26’을 통해 무대에 오르는 연극 ‘개기일식 기다리기’는 극장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창작집단 음이온과 백남준아트센터가 손잡고 제작한 이 작품은 375년 만에 찾아오는 우주적 현상을 관객과 배우가 함께 기다린다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정해진 자리에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며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한 시간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김상훈 연출은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면서도 정작 현재의 시간을 오롯이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킬링 타임’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힐링 타임’을 선사하고자 한다. 연출가는 성수동의 긴 대기 줄이 하나의 콘텐츠가 된 현상을 목격하며,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 그 자체의 소중함을 무대 위에 구현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효율성과 교환 가치에 매몰된 도시인들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 존재함을 일깨워주는 시도다.

 


작품의 규모는 지난 1월 쇼케이스 당시보다 대폭 확대되어 서사의 깊이를 더했다. 60분이었던 공연 시간은 180분으로 늘어났고, 출연 배우 또한 30명으로 증원되어 극장의 밀도를 높였다. 흥미로운 지점은 30명의 배우 중 상당수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배우들은 관객과 동일한 처지에서 기다림의 과정을 공유하며, 무대와 객석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무너뜨린다. 이는 관객을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닌 사건의 공동 참여자로 격상시키는 음이온만의 독창적인 연극 문법이다.

 

제작진은 극장에서 반드시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정인혁 드라마터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태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무대 위 피사체에 집중하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의 질감에 주목할 것을 제안했다. 배우들 역시 기존 연극에서 기대하던 극적 장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관객과 마주해야 하는 만큼, 심리적 조급함을 내려놓고 현존하는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역설적으로 관객을 예술가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만드는 수평적 소통의 통로가 된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개기일식은 연출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상징적 소재다. 미국 텍사스에서 생중계된 개기일식을 친구와 함께 기다리며 느꼈던 축제 같은 분위기와 설렘이 작품의 뼈대가 되었다. 비록 실제 일식 장면을 놓치더라도 함께 기다린 시간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180분의 공연을 지탱하는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 공연의 말미에는 실제 개기일식을 형상화한 장면이 연출되지만, 이는 보상이라기보다 긴 기다림을 함께 견뎌낸 이들이 공유하는 짧은 마침표에 가깝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은 공공극장이 지닌 보수적 형식을 깨는 파격적인 실험이 될 전망이다. 익숙한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무대 장치로 끌어들인 음이온의 시도는 연극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도전적 행보다. 관객들은 돗자리 위에 앉아 배우들과 함께 3시간을 견디며 각자의 내면을 마주하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술적 획득을 약속하지 않는 이 불확실한 기다림이 과연 현대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문화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사진 찍다 걷다 쉬다, 문경새재 하루는 너무 짧다

나란히 남아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숲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 너머에 가려졌던 길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난다.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주요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물건을 나르는 상인, 임지로 향하는 관리들이 이곳을 넘었다. 여행객에게는 여유로운 산책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출세, 공무가 걸린 이동로였다. 같은 흙길 위에 서로 다른 사연이 포개진 셈이다.이 길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설은 세 관문이다. 아래쪽부터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 자리하며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을 형성한다. 지금은 숲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 명소로 눈길을 끌지만, 처음부터 경관을 위해 세운 건축물은 아니다. 관문과 성벽의 배치에는 외적의 이동을 막으려 했던 군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방어시설 정비의 중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문경새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됐고, 1594년 제2관문 일대에 방어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숙종 대에 제1·제3관문과 성벽이 더해지며 방어체계가 갖춰졌다. 세 관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전란 이후 국가가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관문 사이에서는 전쟁과는 다른 역사를 만난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교귀정은 신임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 관찰사가 업무를 인계하던 장소다. 조령원 터는 공무로 길을 나선 이들의 숙박을 지원했던 시설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통·숙박 기반처럼, 옛길에도 사람들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문학과 생활문화 역시 새재를 이해하는 열쇠다. 길을 지나간 문인들의 시에는 산세를 바라보는 감흥과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전해지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들려준다. 성문과 정자가 국가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시와 노래는 그 사이를 걸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여행객이 이러한 흔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데는 흙길의 역할도 크다. 약 6.5㎞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 주변을 살피며 걷게 한다. 관문 앞에서는 성벽을 올려다보고, 유적 주변에서는 안내문을 읽으며 걸음을 늦출 만하다. 전 구간을 완주하기보다는 체력과 일정에 맞춰 돌아올 지점을 정하는 편이 좋다.가을의 문경새재를 즐기는 방법은 단풍 명소를 찾아 사진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숲 사이에 왜 관문이 들어섰는지, 관리와 상인들은 어디에서 쉬었는지 생각하며 걸으면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 문경새재의 매력은 아름다운 자연과 구체적인 삶의 기록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