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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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던 오세훈의 변신? 방학 급식 '든든한끼' 현장

 서울시가 방학 기간 초등학생들의 돌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점심 식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결합한 ‘서울아이 든든한끼’ 사업을 본격화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3일 서대문구의 한 지역아동센터를 찾아 아이들에게 직접 점심을 배식하며 현장 점검에 나섰다. 이번 사업은 오 시장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서울아이 동행 UP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맞벌이 부부나 한부모 가정 등 방학 중 자녀의 끼니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는 단순한 식사 제공을 넘어 독서와 체험 활동이 어우러진 통합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학부모들의 고충을 덜어주겠다는 구상이다.

 

이번 사업은 지난 20일부터 시작되어 다음 달 21일까지 총 5주간 운영된다. 서울 시내 226개 센터에서 진행되는 이번 프로그램은 회차별로 신청을 받아 운영되며, 이미 2회차까지 수백 명의 아동이 신청을 마치는 등 현장의 높은 수요를 확인했다. 이용료는 평일 5일 기준 1만 원으로 책정되었으며, 전문가가 구성한 표준 식단과 더불어 주 2회 제철 과일을 제공하는 등 영양 불균형 해소에도 신경을 썼다. 오 시장은 이날 배식 현장에서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오 시장의 이러한 ‘급식 행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많은 시민은 그가 지난 2011년 전면 무상급식 도입에 반대하며 시장직을 걸고 주민투표를 강행했던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오 시장은 소득 하위 50%에게만 급식을 주어야 한다는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며 기자회견 도중 무릎을 꿇고 눈물로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결국 투표율 미달로 시장직에서 물러났던 그의 과거는, 현재 그가 아이들에게 직접 밥을 퍼주는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진정성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오 시장의 과거 행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아이들 밥그릇을 뺏으려 무릎까지 꿇었던 사람이 이제 와서 급식 전도사 흉내를 내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이 지배적이다. 당시 오 시장이 주장했던 논리가 아이들에게 가난의 낙인을 찍는 행위였다는 비판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울시가 이번 프로젝트에 2030년까지 약 1조 8천억 원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점에 대해서도, 과거 예산 부족을 이유로 무상급식을 반대했던 행보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이번 사업이 단순한 급식 지원을 넘어선 ‘통합 돌봄’임을 강조하고 있다. 급식 단가를 기존보다 인상하고 손 씻기 교육이나 VR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정책의 질을 높였다는 설명이다. 오 시장 역시 탄생부터 학령기 이후까지 촘촘한 돌봄 체계를 구축해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는 이번 사업을 통해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고 실용적인 복지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는 데 주력하는 모양새다.

 

결국 ‘서울아이 든든한끼’는 오세훈 시장에게 정책적 성과와 정치적 부채를 동시에 확인시켜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방학 중 급식 지원이라는 정책 자체는 학부모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일이지만, 시장 개인의 과거 행보가 남긴 깊은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이번 사업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오 시장이 쏟아붓는 막대한 예산과 현장 행보가 시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무릎 꿇은 시장’의 기억을 지워내고 진정한 복지 정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은과 도자기의 충돌…운암산 가마터의 비극

규모의 분청사기 가마가 밀집해 있었으며, 이는 곧 일본군에게 거부할 수 없는 표적이 되었다. 흔히 임진왜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욕이나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국제 경제의 패권을 쥐고 있던 '은'과 '도자기'를 둘러싼 거대한 충돌이 자리 잡고 있었다.당시 동북아시아의 경제 질서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조공 무역 체제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6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하듯 캐낸 은은 유럽을 거쳐 명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명나라의 비단과 도자기는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사치품이었고, 은을 기축통화로 사용하던 명나라는 전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역할을 했다. 세금조차 은으로 납부하게 했던 명나라의 경제 체제는 주변국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러한 명 중심의 독점적 무역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일본의 비약적인 은 생산량 증가였다. 1526년 일본 시네마현의 이와미 은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일본은 단숨에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하는 은 강국으로 부상했다. 연간 20만kg에 달하는 은을 손에 쥔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중심의 경제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통해 직접 교역을 통제하자, 일본은 무역로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한 돌파구로 전쟁을 선택했다.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 바로 도자기다. 당시 도자기는 단순한 그릇을 넘어 오늘날의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수출 품목이었다. 일본은 은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고품질의 도자기로 바꿀 기술력이 부족했다. 반면 조선은 고흥 운암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세계 최고 수준의 분청사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수많은 도공을 납치하고 가마터를 파괴한 것은 경제적 부를 창출할 '기술 자본'을 확보하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고흥 운암산 가마터는 이러한 비극적 역사의 산증인이다. 왜군은 남해안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운암산의 분청사기 생산 기반을 철저히 유린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던 분청사기는 조선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역동적인 미감을 갖추고 있어 일본 다도인들 사이에서 보물 대접을 받았다. 전쟁의 이면에 숨겨진 은과 도자기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때, 고흥의 가마터가 왜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되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오늘날 운암산 가마터에 대한 재조명은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한층 넓혀준다. 단순한 침략과 방어의 역사를 넘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국제 통화인 은을 매개로 충돌했던 거대한 경제사적 사건으로 전쟁을 재해석하게 한다. 고흥군은 현재 산재한 가마터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잊혔던 분청사기의 고향 운암산은 이제 400여 년 전 국제 정세의 파고를 증언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