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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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연금술사 던 응, 소멸 너머의 세계 응시

 시간의 흐름을 얼음이라는 매개체로 붙잡아온 싱가포르 출신 예술가 던 응이 서울 한남동에서 새로운 예술적 여정을 선보인다. 가나아트 한남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개인전 'The Earth Laughs in Flowers'는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천착해온 얼음 프로젝트의 연장선이자 새로운 진화의 결과물이다. 5년 전 전시가 얼음이 녹아 사라지는 찰나의 덧없음을 응시했다면, 이번에는 얼음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 바닥에 남겨진 안료와 모래, 그리고 그 물질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력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의 작업 방식은 인내와 우연이 겹쳐진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 던 응은 안료와 모래를 층층이 쌓아 거대한 얼음 블록을 만든 뒤, 이를 나무 패널 위에서 서서히 녹이거나 깨뜨리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중력과 온도, 물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흩어진 색 가루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석처럼 굳어지며 독특한 지형을 형성한다. 이렇게 완성된 목판 회화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강의 줄기나 거친 해안선, 혹은 수만 년의 세월이 응축된 지질 단면을 떠올리게 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이번 전시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지점은 매체의 다양성이다. 목판 회화 외에도 안료가 종이 섬유 깊숙이 스며들어 은은한 색감을 자아내는 종이 회화와 얼음이 형태를 잃어가는 찰나를 포착한 라이트박스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다. 라이트박스 속 얼음은 고체에서 액체로 변모하는 짧은 순간의 미학을 영구적으로 보존하며, 사라짐이 곧 끝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물질이 상태를 바꿀 뿐, 우주 안에서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물리적 진리를 예술적 언어로 치환해낸다.

 

전시의 제목은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지가 꽃을 통해 웃음을 터뜨린다는 비유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단절된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순환 고리 안에 있음을 시사한다. 던 응은 얼음이 녹아내린 자리에 남은 흔적들을 통해 우리가 상실이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사실은 또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과정임을 역설한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를 넘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행위와도 같다.

 


전시장 내부를 가득 채운 색채의 지형들은 관람객들에게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선사한다. 인위적인 붓질이 아닌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진 무늬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작가는 얼음이라는 차가운 소재를 통해 오히려 생명의 뜨거운 순환을 이야기하며,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무게를 시각적인 질감으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은 작품 사이를 거닐며 사라진 얼음이 남긴 화려한 꽃들의 웃음을 마주하게 된다.

 

던 응의 이번 개인전은 내달 8일까지 가나아트 한남에서 계속된다. 작가가 10여 년간 일관되게 추구해온 시간의 기록법은 이제 소멸을 넘어 영원한 순환의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얼음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안료의 퇴적물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끝이 새로운 시작의 씨앗임을 묵직하게 웅변한다. 서울의 여름 끝자락에서 만나는 이 차갑고도 뜨거운 지형학적 기록들은 동시대 미술이 도달할 수 있는 숭고미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사진 찍다 걷다 쉬다, 문경새재 하루는 너무 짧다

나란히 남아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숲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 너머에 가려졌던 길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난다.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주요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물건을 나르는 상인, 임지로 향하는 관리들이 이곳을 넘었다. 여행객에게는 여유로운 산책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출세, 공무가 걸린 이동로였다. 같은 흙길 위에 서로 다른 사연이 포개진 셈이다.이 길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설은 세 관문이다. 아래쪽부터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 자리하며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을 형성한다. 지금은 숲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 명소로 눈길을 끌지만, 처음부터 경관을 위해 세운 건축물은 아니다. 관문과 성벽의 배치에는 외적의 이동을 막으려 했던 군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방어시설 정비의 중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문경새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됐고, 1594년 제2관문 일대에 방어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숙종 대에 제1·제3관문과 성벽이 더해지며 방어체계가 갖춰졌다. 세 관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전란 이후 국가가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관문 사이에서는 전쟁과는 다른 역사를 만난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교귀정은 신임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 관찰사가 업무를 인계하던 장소다. 조령원 터는 공무로 길을 나선 이들의 숙박을 지원했던 시설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통·숙박 기반처럼, 옛길에도 사람들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문학과 생활문화 역시 새재를 이해하는 열쇠다. 길을 지나간 문인들의 시에는 산세를 바라보는 감흥과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전해지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들려준다. 성문과 정자가 국가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시와 노래는 그 사이를 걸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여행객이 이러한 흔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데는 흙길의 역할도 크다. 약 6.5㎞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 주변을 살피며 걷게 한다. 관문 앞에서는 성벽을 올려다보고, 유적 주변에서는 안내문을 읽으며 걸음을 늦출 만하다. 전 구간을 완주하기보다는 체력과 일정에 맞춰 돌아올 지점을 정하는 편이 좋다.가을의 문경새재를 즐기는 방법은 단풍 명소를 찾아 사진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숲 사이에 왜 관문이 들어섰는지, 관리와 상인들은 어디에서 쉬었는지 생각하며 걸으면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 문경새재의 매력은 아름다운 자연과 구체적인 삶의 기록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