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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파워 스폿, 지친 몸에 박하 향 채우다

 일상의 피로를 털어내고 신비로운 자연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흔히 '파워 스폿'이라 부른다. 경북 영양은 이러한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고장으로,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태고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촛대처럼 우뚝 솟은 선바위와 붉은 병풍을 두른 듯한 자금병이 마주 보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기이한 절경을 안과 밖을 가르는 '석문'이라 칭하며, 그 안쪽에 숨겨진 별세계를 소중히 여겨왔다.

 

석문을 지나 임천마을로 들어서면 조선 시대 민가 정원의 정수로 꼽히는 서석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450년 전 선비 정영방이 당파 싸움을 피해 낙향하여 조성한 별서 정원으로, 연못 자체가 주인이 되는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최근 연구를 통해 정영방이 예순을 넘긴 나이에 이 정원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석지에 담긴 노련한 미학적 관점이 재조명받고 있다. 담장을 낮춰 바깥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비어 있는 마당으로 바람을 받아들이는 배치는 노학자의 원숙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서석지 연못 안에는 물 위로 고개를 내민 19개의 기이한 돌들이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채 자리 잡고 있다. 정영방은 이 돌들에 나비나 갓끈을 씻는 바위 등의 명칭을 붙여 자연에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연못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도랑에도 맑음을 받아들이고 더러움을 뱉어낸다는 뜻의 이름을 붙여 마음 수양의 도구로 삼았다. 정원 안팎의 명소 48곳을 읊은 그의 시 구절을 따라 걷다 보면, 단순한 경치 감상을 넘어 선비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영양의 또 다른 매력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모전석탑에서 발견된다. 전국에 몇 남지 않은 모전탑 중 3기가 영양에 모여 있는데, 국보인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소박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진 삼지동 모전석탑은 탑신 사이로 식물이 뿌리를 내려 마치 앙코르와트의 고대 신전을 연상케 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려한 기교 대신 묵직한 미감을 선사하는 이 탑들은 영양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단단한 위로를 건넨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한 공간들도 영양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서석지 인근의 연당림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카페로,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디저트와 함께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현대판 정자' 역할을 한다. 수비면 죽파리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은 차갑고 알싸한 박하 향 같은 청량감을 선사하는 영양의 숨은 보석이다. 빽빽하게 들어선 하얀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일상의 번잡함은 사라지고 숲의 정령이 주는 맑은 기운만이 온몸을 감싼다.

 

영양은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세심대'와 신선이 살 만한 곳이라는 '동천'이 유독 많은 고장이다. 깎아지른 절벽인 척금대와 연꽃이 가득한 삼지리의 연못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굳이 유명한 명소를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굽이치는 반변천 물길을 따라 걷는 것 자체가 지친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치유의 과정이 된다. 박하 향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영양의 산천은 올여름 마지막 휴식을 꿈꾸는 이들에게 최적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판소리와 포크의 만남…구례 가을밤 울린 ‘시인의 마을’

추임새와 박수가 이어졌다. 전통 판소리의 깊은 울림에 이어 익숙한 포크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노래와 함께 호흡하며 구례의 가을밤을 즐겼다.지난 17일 밤 열린 구례 동편제소리축제에서는 지역 명창들의 판소리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소리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무대를 선사했다.이날 구례 명창들의 공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박정선 명창의 ‘적벽가’였다. 박 명창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힘 있는 소리로 풀어냈다.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관객들은 추임새와 박수로 소리꾼의 무대에 호응했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긴장감이 무대를 채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 속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소리꾼의 목소리와 몸짓에 관객의 반응이 더해지며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함께 만들어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공연의 분위기는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무대에 오르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오랜 시간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해 온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마을’의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노래의 첫 소절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반응에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노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겼다. 앞선 판소리 무대에서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며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집중했다. 한 곡의 노래가 오랜 세월 쌓인 기억을 불러내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정태춘·박은옥은 ‘북한강에서’ 등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며 공연의 여운을 이어갔다.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국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이를 전하는 목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판소리와 포크음악은 표현 방식과 음악적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소리와 이야기로 전해왔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며 청중과 소통해 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이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다.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으로, 동편제 판소리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역 명창들의 전통 소리를 감상한 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만나는 구성은 이번 축제의 특별한 장면으로 남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첨단 조명과 대형 LED 화면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오래된 판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경계보다 서로 다른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감동을 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무대였다.전통문화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장르와 어우러질 때, 전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판소리의 추임새와 대중가요를 향한 박수가 같은 밤에 이어진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구례 동편제소리축제의 가을밤은 그렇게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함께 만드는 공연장으로 변했다. 명창의 소리에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를 외쳤고, ‘시인의 마을’이 시작되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출발한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고, 관객들은 그 울림을 함께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