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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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던져 피운 질서… 이강소 개인전 개막

 흙을 공중에 던지는 순간 신체의 물리적 궤적과 중력이 교차하며 뜻밖의 형상이 탄생한다. 작가의 인위적 의도를 비껴간 결과물은 우연을 넘어 자연 본연의 필연적 질서를 입증해 보인다. 다듬어진 정제함 대신 물질과 힘의 유기적 관계를 드러내는 조각 실험은 반세기 넘게 이어진 거장의 핵심 창작 기조다.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이강소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이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실험미술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150여 점의 다채로운 작품을 통해 종합적으로 조명한다.

 


전시장에서는 기존 회화 중심의 조명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던 조각과 판화 매체를 대거 선보인다. 각 시기별 대표 조각 30여 점과 판화 20여 점이 한데 모였으며, 지필묵을 활용해 수묵화 형태로 풀어낸 ‘바람이 분다’ 신작 시리즈가 최초로 베일을 벗는다.

 

여든을 넘긴 노장 화백은 완성된 결과물을 고수하기보다 통제되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의외성의 가치를 지속해서 탐구해왔다. 작가의 정교한 구획을 벗어난 즉흥적 행위 속에서 마주하는 신비로움이야말로 창작의 본질적인 원동력이자 작업을 관통하는 궁극의 화두다.

 


예측 가능한 수순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붓질과 신체적 행위는 무수히 많은 형상을 피워내고 다시 소멸시키는 순환을 보여준다. 정해진 목적지에 연연하지 않고 물질 자체의 흐름에 작가의 몸을 내맡기는 태도는 한국 실험미술의 독창적인 지평을 열어젖혔다.

 

이번 전시는 거장의 지난 자취를 되짚는 단편적 회고를 넘어, 여전히 새로움을 모색하는 한 예술가의 끊임없는 탐구열을 직관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회화와 조각, 설치와 판화를 아우르는 정교한 구성은 작가가 일궈낸 자유로운 조형 세계를 다각도로 입증한다.

 

사진 찍다 걷다 쉬다, 문경새재 하루는 너무 짧다

나란히 남아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숲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 너머에 가려졌던 길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난다.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주요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물건을 나르는 상인, 임지로 향하는 관리들이 이곳을 넘었다. 여행객에게는 여유로운 산책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출세, 공무가 걸린 이동로였다. 같은 흙길 위에 서로 다른 사연이 포개진 셈이다.이 길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설은 세 관문이다. 아래쪽부터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 자리하며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을 형성한다. 지금은 숲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 명소로 눈길을 끌지만, 처음부터 경관을 위해 세운 건축물은 아니다. 관문과 성벽의 배치에는 외적의 이동을 막으려 했던 군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방어시설 정비의 중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문경새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됐고, 1594년 제2관문 일대에 방어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숙종 대에 제1·제3관문과 성벽이 더해지며 방어체계가 갖춰졌다. 세 관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전란 이후 국가가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관문 사이에서는 전쟁과는 다른 역사를 만난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교귀정은 신임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 관찰사가 업무를 인계하던 장소다. 조령원 터는 공무로 길을 나선 이들의 숙박을 지원했던 시설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통·숙박 기반처럼, 옛길에도 사람들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문학과 생활문화 역시 새재를 이해하는 열쇠다. 길을 지나간 문인들의 시에는 산세를 바라보는 감흥과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전해지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들려준다. 성문과 정자가 국가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시와 노래는 그 사이를 걸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여행객이 이러한 흔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데는 흙길의 역할도 크다. 약 6.5㎞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 주변을 살피며 걷게 한다. 관문 앞에서는 성벽을 올려다보고, 유적 주변에서는 안내문을 읽으며 걸음을 늦출 만하다. 전 구간을 완주하기보다는 체력과 일정에 맞춰 돌아올 지점을 정하는 편이 좋다.가을의 문경새재를 즐기는 방법은 단풍 명소를 찾아 사진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숲 사이에 왜 관문이 들어섰는지, 관리와 상인들은 어디에서 쉬었는지 생각하며 걸으면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 문경새재의 매력은 아름다운 자연과 구체적인 삶의 기록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