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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보다 먼저인 종교? 신석기 유적의 반전

 아나톨리아 고원을 가로지르는 길 위에는 인류가 남긴 거대한 문명의 흔적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로마 제국은 영토 확장의 혈맥인 도로와 민중의 결속을 위한 극장 건설에 국력을 쏟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지중해 거점 도시들을 잇던 해양 경로와 내륙 가도는 단순한 이동로를 넘어 문화와 물자가 흐르는 통로였다. 이러한 로마의 유산은 오늘날 아스펜도스와 에페수스, 히에라폴리스의 거대한 원형 극장으로 남아 여전히 그 웅장함을 뽐낸다. 특히 아스펜도스 극장은 완벽한 보존 상태 덕분에 매년 여름 현대적인 공연이 열리는 살아있는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투르크 시대의 유산인 '카라반사라이'는 실크로드를 누비던 상인들의 안식처였다. 카파도키아에서 콘야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마주하게 되는 이 숙소들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며 대상들에게 안전한 휴식과 편의를 제공했다. 13세기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정수를 보여주는 술탄하니의 카라반사라이는 견고한 성채이자 편안한 호텔, 그리고 거대한 물류 창고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과거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한 이곳의 석조 건축물은 척박한 광야를 이동하던 이들에게 국가가 제공했던 최고의 복지 시설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번 여정의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신석기 시대의 종교 유적 괴베클리 테페에서 마주한다. 기원전 9,5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고 정착 생활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도의 종교 의식을 치렀음을 증명한다. 샨르우르파 인근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곳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는 인류사적 보물이다. 1960년대 처음 존재가 알려진 이후 독일과 튀르키예 연구팀의 끈질긴 발굴 끝에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이 창조한 최초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 발굴 이전부터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 '소망의 언덕'이라 불리며 신성시되었던 이곳은 거대한 T자형 돌기둥들이 타원형을 이루며 배치된 독특한 구조를 띤다. 기원전 8,000년경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진 이 유적은 수천 년 동안 흙 속에 묻혀 있었기에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땅속 물리 탐사를 통해 주변 20여 곳에 추가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고고학계의 흥분을 자아내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는 이 소중한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발굴 현장 위에 거대한 타원형 지붕과 보행 데크를 설치했다. 방문객들은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류 최초의 성전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2021년부터 본격화된 추가 발굴 작업은 괴베클리 테페가 단일 유적이 아니라 거대한 종교 단지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신석기인들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깎고 세웠는지, 그들이 숭배했던 대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발굴단의 삽 끝에 달려 있다.

 

로마의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오페라 선율과 1만여 년 전 신전에서 느껴지는 정적은 튀르키예 여행이 선사하는 극적인 대비다. 술탄하니의 견고한 벽면에서 상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괴베클리 테페의 돌기둥 앞에서 인류의 기원을 되묻는 과정은 단순한 관광 이상의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땅 밑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으며, 현대인들에게 문명의 진정한 의미와 보존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판소리와 포크의 만남…구례 가을밤 울린 ‘시인의 마을’

추임새와 박수가 이어졌다. 전통 판소리의 깊은 울림에 이어 익숙한 포크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노래와 함께 호흡하며 구례의 가을밤을 즐겼다.지난 17일 밤 열린 구례 동편제소리축제에서는 지역 명창들의 판소리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소리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무대를 선사했다.이날 구례 명창들의 공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박정선 명창의 ‘적벽가’였다. 박 명창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힘 있는 소리로 풀어냈다.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관객들은 추임새와 박수로 소리꾼의 무대에 호응했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긴장감이 무대를 채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 속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소리꾼의 목소리와 몸짓에 관객의 반응이 더해지며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함께 만들어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공연의 분위기는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무대에 오르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오랜 시간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해 온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마을’의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노래의 첫 소절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반응에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노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겼다. 앞선 판소리 무대에서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며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집중했다. 한 곡의 노래가 오랜 세월 쌓인 기억을 불러내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정태춘·박은옥은 ‘북한강에서’ 등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며 공연의 여운을 이어갔다.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국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이를 전하는 목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판소리와 포크음악은 표현 방식과 음악적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소리와 이야기로 전해왔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며 청중과 소통해 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이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다.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으로, 동편제 판소리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역 명창들의 전통 소리를 감상한 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만나는 구성은 이번 축제의 특별한 장면으로 남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첨단 조명과 대형 LED 화면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오래된 판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경계보다 서로 다른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감동을 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무대였다.전통문화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장르와 어우러질 때, 전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판소리의 추임새와 대중가요를 향한 박수가 같은 밤에 이어진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구례 동편제소리축제의 가을밤은 그렇게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함께 만드는 공연장으로 변했다. 명창의 소리에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를 외쳤고, ‘시인의 마을’이 시작되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출발한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고, 관객들은 그 울림을 함께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