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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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의 귀환, 서도호의 '무지갯빛 집' 열린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무지갯빛 투명한 천으로 연결되어 서울의 중심부에 내려앉았다. 뉴욕과 런던, 베를린 등 작가가 머물렀던 도시의 집들을 22m 길이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구현한 서도호의 대규모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막을 올린다. 이번 전시는 8월 27일부터 내년 2월 9일까지 진행되며, 30여 년간 '집'이라는 화두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과 이동의 문제를 탐구해온 작가의 예술 여정을 총망라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서도호 예술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미공개 초기작부터 2026년 최신작까지 5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군이다. 전시장 입구 복도에 설치된 '시드 뱅크'는 작가의 유년 시절 드로잉과 조각, 대학 시절의 실험적인 작업들을 모아놓은 예술적 저장고다. 어린 시절 마당의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품 등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작품들은, 훗날 세계 미술계를 매료시킨 서도호만의 독창적인 시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시 공간은 작품의 연대기적 나열보다는 작가의 사유가 확장되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3전시실 입구에 놓인 성북동 한옥 대문 재현작 '작은 문'을 지나면, 작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드로잉 200여 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으로 수묵화의 거장 서세옥의 아들이기도 한 작가는, 동양적인 선의 미학과 서구적인 조각 기법을 결합해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언어를 구축해왔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한다.

 

4전시실에서는 서도호의 대표적인 연작인 '러빙/러빙'이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종이를 특정 장소에 밀착시킨 뒤 흑연으로 문질러 그 표면의 흔적을 기록하는 이 작업은,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애정과 기억을 동시에 담아낸다. 작가는 '문지르다'와 '사랑하다'의 발음적 유사성을 활용해 장소에 대한 물리적 기록을 정서적 유대로 승화시켰다. 성북동 한옥을 기록한 작품이 개인의 향수를 자극한다면, 광주극장 사택을 담은 작업은 공동체의 역사로 시선을 확장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서도호는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이후 뉴욕 MoMA와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여왔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 물리적인 벽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심리적 거주지'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다. 투명한 천으로 지어진 그의 집들은 관람객들에게 집이란 단순히 머무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이동하든 함께 짊어지고 다니는 기억의 덩어리임을 상기시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3·4·5전시실과 공용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서도호라는 거장의 사유가 어떻게 변화하고 심화되었는지 보여주는 입체적인 지도가 될 것이다. 관람객들은 투명한 천 사이를 거닐며 작가가 살았던 집의 문고리와 벽면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3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500여 점의 작품들은 서울이라는 장소에서 작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프로젝트를 하나로 묶어내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판소리와 포크의 만남…구례 가을밤 울린 ‘시인의 마을’

추임새와 박수가 이어졌다. 전통 판소리의 깊은 울림에 이어 익숙한 포크음악이 흐르자 관객들은 노래와 함께 호흡하며 구례의 가을밤을 즐겼다.지난 17일 밤 열린 구례 동편제소리축제에서는 지역 명창들의 판소리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의 공연이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 소리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어우러지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무대를 선사했다.이날 구례 명창들의 공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박정선 명창의 ‘적벽가’였다. 박 명창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 힘 있는 소리로 풀어냈다.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관객들은 추임새와 박수로 소리꾼의 무대에 호응했다.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긴장감이 무대를 채우면서 관객들은 이야기 속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꼈다. 소리꾼의 목소리와 몸짓에 관객의 반응이 더해지며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객석과 함께 만들어지는 경험으로 이어졌다.공연의 분위기는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무대에 오르면서 또 한 번 달라졌다. 오랜 시간 삶과 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해 온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마을’의 연주가 시작되자 관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노래의 첫 소절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반응에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노래에 대한 반가움이 담겼다. 앞선 판소리 무대에서 추임새로 공연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이번에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며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집중했다. 한 곡의 노래가 오랜 세월 쌓인 기억을 불러내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정태춘·박은옥은 ‘북한강에서’ 등 자신들의 노래를 들려주며 공연의 여운을 이어갔다. 화려한 무대 연출 속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결국 노래에 담긴 이야기와 이를 전하는 목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판소리와 포크음악은 표현 방식과 음악적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소리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소리와 이야기로 전해왔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며 청중과 소통해 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이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이유다.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으로, 동편제 판소리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역 명창들의 전통 소리를 감상한 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를 만나는 구성은 이번 축제의 특별한 장면으로 남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가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첨단 조명과 대형 LED 화면이 설치된 무대 위에서는 오래된 판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경계보다 서로 다른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감동을 전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무대였다.전통문화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장르와 어우러질 때, 전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판소리의 추임새와 대중가요를 향한 박수가 같은 밤에 이어진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구례 동편제소리축제의 가을밤은 그렇게 전통과 현대의 음악이 함께 만드는 공연장으로 변했다. 명창의 소리에 관객들은 “얼씨구”와 “좋다”를 외쳤고, ‘시인의 마을’이 시작되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출발한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하나로 이어졌고, 관객들은 그 울림을 함께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