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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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로봇 K-456, 광주에서 다시 묻다


60년 전 뉴욕 거리를 누볐던 백남준의 로봇 ‘K-456’이 광주에서 다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묻는다. 1960년대 로봇 예술의 출발점이 된 작품부터 오늘날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술까지 한자리에 모이며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오는 23일부터 11월 8일까지 아시아 대표 아트-테크놀로지 축제인 ‘ACT 페스티벌 2026’을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올해 축제에는 국내외 29팀이 참여해 전시와 공연, 대담 등을 선보인다.

 

축제의 중심에는 백남준의 첫 로봇 작품으로 알려진 ‘K-456’이 자리한다. 1964년 탄생한 K-456은 무선 조종으로 움직이며 실제 사람처럼 거리를 걷도록 만들어졌다.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틀거나 콩을 배설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선보이며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흔들었다.

 

K-456은 단순히 로봇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계가 인간의 행동을 흉내 내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면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줬다. 백남준의 실험적인 시도가 오늘날 로봇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술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 작품은 1982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에서도 강렬한 장면을 남겼다. 당시 백남준은 K-456을 뉴욕 거리로 데리고 나갔고, 로봇은 자동차에 치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백남준은 이를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표현했다.

 


이번 ACT 페스티벌에서는 뉴욕 일렉트로닉 아츠 인터믹스가 제공한 영상 두 편을 통해 K-456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로봇이 뉴욕 소호 거리를 걷는 장면과 자동차에 치이는 퍼포먼스가 영상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올해 축제의 주제는 ‘아이, 휴먼: 테크네세에 응답하기’다. 기술이 인간의 감각과 선택, 행동 방식까지 바꾸고 있는 시대에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기술을 단순히 편리한 도구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인간과 기술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예술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이번 축제의 핵심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60여 년 전 만들어진 K-456과 동시대 피지컬 AI 작품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초기 로봇 예술과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서로 마주하는 구성이다. 과거 백남준이 상상했던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작가들의 신작도 공개된다. 노진아, 정혜련, 권혜원 작가는 ACC 커미션을 통해 제작한 새로운 작품을 이번 축제에서 처음 선보인다. 이들의 작품은 피지컬 AI를 비롯한 최신 기술을 활용해 인간과 기계, 감각과 기억의 관계를 탐구한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 가운데 캐나다 감독 발리 푸굴랭의 ‘트레이스: 애도의 프로세서, 광주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네 명이 함께 체험하는 VR 다큐멘터리로, 광주의 역사와 기억을 담은 특별 버전으로 제작됐다.

 

감독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약 2주 동안 광주에 머물며 5·18민주화운동 오월어머니들을 만났다. 이와 함께 무등산을 비롯한 광주의 장소와 역사도 직접 조사했다. 그 결과 개인의 상실과 광주가 간직한 기억, 공동체의 애도를 연결하는 가상의 숲을 작품 속에 구현했다.

 


이 작품은 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을 통해 기억과 애도라는 인간적인 경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축제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기술이 현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과 공동체가 기억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ACT 페스티벌에서는 전시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오디오비주얼 콘서트와 대담 등이 축제 기간 동안 진행되며, 관람료는 모두 무료다. 과거의 로봇 예술부터 현재의 피지컬 AI와 VR 기술까지 다양한 작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김상욱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은 이번 페스티벌에 대해 60여 년 전 뉴욕 거리에서 자동차 사고를 겪은 백남준의 K-456부터 오월 어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은 가상의 숲까지 기술의 시대에 잠시 멈춰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이 예술의 무대에 등장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이 창작 과정에 참여하고 실제 공간에서 움직이는 피지컬 AI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번 ACT 페스티벌은 이러한 기술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감각과 기억, 선택과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예술 작품을 통해 살펴볼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찍다 걷다 쉬다, 문경새재 하루는 너무 짧다

나란히 남아 있다. 붉고 노랗게 물든 숲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 너머에 가려졌던 길의 역할이 하나씩 드러난다.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주요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물건을 나르는 상인, 임지로 향하는 관리들이 이곳을 넘었다. 여행객에게는 여유로운 산책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계와 출세, 공무가 걸린 이동로였다. 같은 흙길 위에 서로 다른 사연이 포개진 셈이다.이 길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설은 세 관문이다. 아래쪽부터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 자리하며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을 형성한다. 지금은 숲과 어우러진 사진 촬영 명소로 눈길을 끌지만, 처음부터 경관을 위해 세운 건축물은 아니다. 관문과 성벽의 배치에는 외적의 이동을 막으려 했던 군사적 판단이 담겨 있다.방어시설 정비의 중요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을 겪으며 문경새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됐고, 1594년 제2관문 일대에 방어시설이 들어섰다. 이후 숙종 대에 제1·제3관문과 성벽이 더해지며 방어체계가 갖춰졌다. 세 관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일은 전란 이후 국가가 어떤 대비책을 마련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관문 사이에서는 전쟁과는 다른 역사를 만난다.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의 교귀정은 신임 경상도 관찰사와 이임 관찰사가 업무를 인계하던 장소다. 조령원 터는 공무로 길을 나선 이들의 숙박을 지원했던 시설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교통·숙박 기반처럼, 옛길에도 사람들의 이동을 뒷받침하는 공간이 필요했다.문학과 생활문화 역시 새재를 이해하는 열쇠다. 길을 지나간 문인들의 시에는 산세를 바라보는 감흥과 시대를 살아가는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전해지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들려준다. 성문과 정자가 국가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시와 노래는 그 사이를 걸었던 개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여행객이 이러한 흔적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데는 흙길의 역할도 크다. 약 6.5㎞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기보다 주변을 살피며 걷게 한다. 관문 앞에서는 성벽을 올려다보고, 유적 주변에서는 안내문을 읽으며 걸음을 늦출 만하다. 전 구간을 완주하기보다는 체력과 일정에 맞춰 돌아올 지점을 정하는 편이 좋다.가을의 문경새재를 즐기는 방법은 단풍 명소를 찾아 사진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숲 사이에 왜 관문이 들어섰는지, 관리와 상인들은 어디에서 쉬었는지 생각하며 걸으면 익숙한 풍경이 달라진다. 문경새재의 매력은 아름다운 자연과 구체적인 삶의 기록을 한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